제5 公冶長篇

논어 공야장 5-21~~~

예암 노마드 2013. 8. 1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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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공야장5-21  

5-21.

子曰, “甯武子 邦有道則知하고 邦無道則愚하니 其知可及也어니와 其愚 不可及也니라

자왈, “영무자 방유도칙지하고 방무도칙우하니 기지가급야어니와 기우 불가급야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섰을 때는 슬기로움을 나타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어리석은 척 했으니, 그 슬기는 따르는 이 있거니와 그 우직함은 따를 이 없느니라.”

 

①甯武子(영무자) : 위나라의 대부. 성은 甯, 이름은 兪(). 시호는 武.

 

集註

甯武子 衛大夫, 名兪. 按春秋傳 武子仕衛, 當文公成公之時. 文公有道, 而武子無事可見, 此其知之可及也. 成公無道, 至於失國而武子周旋其間, 盡心竭力, 不避艱險. 凡其所處,皆智巧之士所深避而不肯爲者, 而能卒保其身, 以濟其君, 此其愚之不可及也.

녕무자 위대부, 명유. 안춘추전 무자사위, 당문공성공지시. 문공유도, 이무자무사가현, 차기지지가급야. 성공무도, 지어실국이무자주선기간, 진심갈력, 불피간험. 범기소처,개지교지사소심피이불긍위자, 이능졸보기신, 이제기군, 차기우지불가급야.

 

영무자는 위나라 대부로 이름은 유이다. ‘춘추전에 영무자가 위나라에서 벼슬한 것은 문공․ 성공시대에 해당한다. 문공은 도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 시기의 영무자에게는 특별히 볼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지혜로움을 따를 만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공은 무도하여 나라를 잃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영무자는 그 소용돌이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처세는 모두 지혜롭고 꾀 있는 선비라면 다 회피하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지만, 영무자는 끝내 자기 몸을 보전하고 그 임금을 구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어리석음은 따르기 어렵다.”고 하신 말씀이다.

 

集註

程子曰, “邦無道 能沈晦以免患 故曰不可及也. 亦有不當愚者 比干 是也.”

정자가 말하길,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화를 면한다. 그러므로 따를 수 없다고 말씀하신거다. 그러나, 도가 없다고 어리석은 척 만할 수 없는 것이니, 용감히 간하다가 죽은 비간은 다른 상황인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8(BC 632),

六月 晉人復衛侯. 甯武子與衛人盟于宛濮 曰, “天禍衛國 君臣不協 以及此憂也. 今 天誘其衷 使皆降心以相從也. 不有居者 誰守社稷 不有行者 誰扜牧圉. 不協之故 用昭乞盟于爾大神以誘天衷.

自今日以往 旣盟之後 行者無保其力 居者無懼其罪. 其有渝此盟 以相及也 明神先君 是糺是殛.”

國人聞此盟也 而後不貳.

육월 진인복위후. 녕무자여위인맹우완복 왈, “천화위국 군신불협 이급차우야. 금 천유기충 사개항심이상종야. 불유거자 수수사직 불유행자 수우목어. 불협지고 용소걸맹우이대신이유천충.

자금일이왕 기맹지후 행자무보기력 거자무구기죄. 기유투차맹 이상급야 명신선군 시규시극.”

국인문차맹야 이후불이.

 

유월에 진나라 사람이 위나라 군주를 돌려보냈다. 영무자가 위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과 완복에서 맹서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위나라에 화를 내리어 군주와 신하가 하나 되지 못해서, 이런 곤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늘이 사람들이 성심을 갖게 하여 모든 사람이 다 겸손하여 서로 의좋게 하게 하였다. 나라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 누가 국가를 지키어 왔고,

군주를 따라 외국으로 간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누가 군주가 타고 다니실 말을 돌보았을까요?

서로들 협심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 이 나라의 큰 신에게 서로 맹서하고, 성심을 갖도록 해탈하며 소원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부터 이후로는, 이미 맹서를 한 후이니 국외로 갔던 사람은 뽐내지 말고, 나라에 있던 사람들은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맹서를 어김에 있어서, 서로 반목을 함에는 도리에 밝은 신과 이 나라의 선대 군주님의 영혼이 그걸 규탄하고 죽일 것입니다.”라 했다. 나라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맹서를 듣고 난 후로는 이럴까 저럴까 하는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

(위 영무자의 말은, 284월에 晉, , , 秦과 楚가 성복에서 衛의 문제로 싸웠다. 이에 楚가 패하니 초나라는 대부 득신을 죽이고, 위나라 군주인 후작이 초로 달아났는데, 晉 나라 사람이 위나라 군주인 후작을 잡아 서울로 보냈다. 晉에 붙잡혀 있던 성공이 귀환하자 한 연설이다.

그 후, 성공은 반대파로부터 고소를 당해 당시 패자인 晉文公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영무자는 두 사람과 같이 성공을 변호하였으나, 패하여 다른 두 변호인은 죽임을 당하고 발목이 잘리었고, 영무자만 충성심이 인정되어 화를 면했다. 진나라에서도 영무자는 존경을 받았다.

패한 성공은 주나라 수도(천자가 있는)로 송환되어 밀실에 유폐되었다. 이때 영무자는 따라가 음식을 넣어주고 돌봤다. 진나라 군주가 감옥에 있는 성공을 독살시키려 의사 연을 매수하였다. 영무자는 다시 의사 연을 매수하여 독을 연하게 타도록 해 군주의 생명을 건진다.)

  [출처] 논어공야장5-21-----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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