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 公冶長篇

논어공야장5-19~~~

예암 노마드 2013. 8. 16.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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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공야장5-19  

5-19.

崔子 弑齊君 陳文子 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違之 何如.” 子曰, “淸矣, “仁矣乎.” , “未知 焉得仁.”

최자 시제군 진문자 유마십승 기이위지 지어타방 칙왈 유오대부최자야.” 위지 지일방 칙우왈 유오대부최자야위지 하여.” 자왈, “청의, “인의호.” , “미지 언득인.”

 

자장이 또 묻기를,

최저가 제나라 장공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10승의 말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갔으며, 거기서도 역시 몹쓸 신하가 있음을 보고서, “여기도 우리나라의 대부 최자 같다.”고 하고 떠났으며, 다른 나라에 가서도 역시우리 최자 같다.” 고 말하고 떠났으니 그는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청렴결백하다.”라 하시자, 자장이 인이라 하겠습니까?”하니, “아직 지혜롭지 못하니 어찌 인을 얻었다 하겠는가?”

 

③崔子(최자) : 제나라의 대부. 崔杼.

④陳文子(진문자) : 성은 진(), 이름은 수무(수무), 시호는 文.

 

春秋左氏傳 莊公 30(BC 664)

鬪穀於菟爲令尹 自毁其家 以紓楚國之難. 투곡어토위영윤 자훼기가 이서초국지난.

투곡어토가 영윤이 되어 자기 집 가재를 갈라내어 초나라의 재정적 곤란을 해결했다.

 

春秋左氏傳 僖公 23(BC 637)

楚成得臣帥師伐陳 討其貳於宋也 遂取焦夷 城頓而還 子文以爲之功 使爲令尹 叔伯曰, 子若國何. 對曰, 吾以靖國也. 夫有大功而無貴仕 其人能靖者與有幾.

초성득신수사벌진 토기이어송야 수취초이 성돈이환 자문이위지공 사위영윤 숙백왈, 자약국하. 대왈, 오이정국야. 부유대공이무귀사 기인능정자여유기.

 

초나라 성득신이 군사로 진나라를 쳤다. 그것은 진이 송나라와 통함을 응징하였던 것이다.

(), () 땅을 빼앗고 頓()에 성을 쌓고 돌아왔다. 공자 문은 성득신의 공이라 하여 그로 하여금 영윤이 되게 했다. 이에 숙백이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나라를 어찌 하려는 겁니까?” 자문이 답하기를, “나는 나라를 평온케 하려고 하오. 큰 공이 있으면 귀한 자리를 주지 않으면 온전한 마음으로 있을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이오.”

 

春秋左氏傳 襄公 25(BC 548)

春 齊崔杼帥師 伐我北鄙.

齊棠公之妻 東郭偃之妹也. 東郭偃臣崔武子. 棠公死 偃御武子 以弔焉. 見棠姜而美之 使偃取之. 偃曰, 男女變姓 今君出自丁 臣出自桓 不可. 武子莁之 遇困☱☵之大過☱☴. 史皆曰吉. 示陳文子

文子曰, 夫從風 風隕妻 不可娶也. 且其繇曰 困于石 據于蒺藜. 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困于石 往不濟也. 據于蒺藜 所恃傷也. 入于其宮 不見妻 凶 無所歸也. 崔子曰, 오也 何害. 先夫當之矣. 遂取之.

춘 제최저수사 벌아북비.

제당공지처 동곽언지매야. 동곽언신최무자. 당공사 언어무자 이조언. 견당강이미지 사언취지. 언왈, 남녀변성 금군출자정 신출자환 불가. 무자무지 우곤☱☵지대과☱☴. 사개왈길. 시진문자

문자왈, 부종풍 풍운처 불가취야. 차기요왈 곤우석 거우질려. 입우기궁 불견기처 흉.

곤우석 왕불제야. 거우질려 소시상야. 입우기궁 불견처 흉 무소귀야. 최자왈, 누야 하해. 선부당지의. 수취지.

 

봄에 제 최저가 노나라 변경을 쳤다.

제나라 당의 땅을 다스린 사람의 아내는 동곽언의 누님이었다. 동곽언은 최무자(최저)의 가신이었다. 당을 다스리는 사람이 죽자, 동곽언은 최무자가 탄 수레를 몰고 가 조문을 했다.

최무자는 죽은 당을 다스린자의 아내 강씨의 미모를 보고, 동곽언을 통해 처로 맞이하려 했다.

동곽언이 말하길, ‘부부는 성을 달리 하는 것인데 공은 정공의 후손이고, 저는 환공의 후손이어 동성이니 아니 됩니다.’ 했다.

그래서 솟대점을 쳤더니, 困의 卦가 大過의 괘로 변하는 괘가 나왔다. 사관들은 다 길하다 하였다. 진문자에게 보이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편은 바람을 따르고, 바람은 妻를 떨어뜨리는 괘이니 맞이할 수 없습니다. 풀이에 이르길, ‘돌한테 고난을 받고 가시가 있는 질려에 의지한다. 집에 들어가 처를 보지 못하니 흉하다.’ 했습니다. 돌한테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것이고 가시가 있는 질려에 의지한다는 것은, 믿는 것한테 상한다는 것입니다.

, 집에 들어가 아내를 보지 못하여 흉하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망을 들은 최무자는, ‘그 여자는 과부인데 무슨 해가 되겠오? 그 액운은 전남편이 당했던 것이오.’ 말했다. 그리고 바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莊公通焉 驟如崔氏 장공통언 취여최씨

제나라 군주 장공이 최저의 아내와 통하여 자주 최씨의 집에 찾아 갔다.

夏五月乙亥 齊崔杼弑其君光. 하오월을해 제최저시기군광.

여름철 오월 을해날 제 최저가 그의 군주 광을 죽였다.

위 오월 을해일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갑술날 향연(거나라 군주)에 칭병하고 참석치 않은 최저를 문병하고자, 을해날에 군주는 최저를 문병하고 그의 아내 강씨를 쫒아갔다. 강씨는 방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옆문으로 최저와 빠져나왔다. 군주는 기둥을 치며 노래 불렀다. 시종 가거는 다른 시종자들을 대문 밖에 있도록 하고 자신만 들어가 대문을 걸어 잡갔다. 무장한 병사들이 덤벼들자, 군주는 대에 올라가 살려 달라 청했지만 듣지 않았고, 군주가 맹서를 하겠다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고, 종묘에 가 자살 하겠다 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군주가 담을 넘음에 활을 쏘아 떨어지니 곧바로 죽이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또 군주의 시체를 보기를 원하던 많은 자들이 죽었다.

晏子가 대문 밖에서 군주의 시체를 보기를 원하였다. 대문이 열리자 군주의 시체를 위에 올리고 곡을 하고 세 번 뛰는 예를 취했다. 최저의 가신이 안자를 죽이자고 했으나, 최저는 저사람은 백성들의 신임을 받으니 그를 놓아 주어야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다. 했다.

그 후, 제나라 대부들과 거나라 군주가 맹약을 맺을 때, 대사관이 역사기록부에 최저가 군주를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최저는 그를 죽이었다. 그 아우 둘이 계속 그리 썼다. 또 죽였다. 또 아우가 쓰니 그때는 살려 주었다.

그 후, 최저의 아들은 합심하여 동곽언, 당무구를 죽였고 가신들은 다 도망해 사람이 없었다. 최저의 사주로 경봉이 아들 최성, 최강을 죽이었고, 최저는 집에 돌아가 목매어 죽었다. (양공 27BC 546)

[출처] 논어공야장5-19-----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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