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16장~~~

예암 노마드 2014. 2. 2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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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16장

[原文] 

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天道員員) 各復歸其根

 만물병작       오이관복       부물운운(천도원원)                 각복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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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根曰靜  是謂復命

귀근왈정        시위복명

復命曰常  知常曰明

복명왈정        지상왈명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부지상      망작흉     지상용      용내공      공내왕     왕내천      천내도     도내구

沒身不殆.

몰신불태

 

 [해석] 

 

완전히 텅 비우고,

오로지 고요함 만을 지키고 있으니,

 

온갖 만물은 함께 아우러져서 변화하는데,

근원에서 나는 이것들이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있네.

 

하늘의 도리는 돌고 돌면서

만물은 각자 그 근원으로 되돌아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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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으로 되돌아 온 것을 고요함이라 하며,

이를 일러 하늘의 뜻을 회복한 것이라고 말하네.

 

하늘의 뜻이 회복된 것을 일러 늘 변함없는 평상심이라 하고,

평상심이 있음을 아는 것을 밝은 깨달음이라고 하네. 

 

평상심을 모르면

허망하게 재앙만을 일으키게 되고, 

 

평상심을  알면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너그러운 포용성을 지니게 되며,

포용성을 지니는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보편적 존재이네.

 

공평한 보편적 존재는 곧 천하의 왕이오,

천하의 왕은 곧 하늘(神)이네.

 

하늘(神)은 곧 道이며,

道는 영구불변하네. 

 

육신은 죽어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참나(道)에게는 아무런 위태로움도 없네.  

 

[해 설]

본 16장은 곽점본에 있으며, 백서본에서는 60장, 왕필본에서는 16장입니다.

세가지 판본의 글자들이 다른 것이 많아서 본 해석에서는 왕필본을 주로 해석하고 나서, 동시에 곽점본과 백서본을 문장별로 해석해서 비교해 보았읍니다.

이번 장은 텅 비움과 고요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원래 곽점 초간본은 짧은 글이지만,

후대의 백서본에서 부터 덧붙힌 글이 좀 길어져서

왕필본에도 그대로 전승된 것 같읍니다.

 

곽점본 초간에서는,

텅빔을 유지하면서 고요함을 지키고 있으니,

온갖 삼라만상이 절대본체에서 나와서 그 근원으로 되돌아 가는 도리(道理)를

혼잣말 형식으로 묘사한 내용입니다.

그 곽점본의 기본 문장을 이어서 연결한 백서본이나 왕필본에서 추가로 덧붙혀진 문장들은  靜(고요함)으로부터 이어지는 復命,常,明,그리고 容,公,王,天,道로 다시 되돌아가는 말 이어지기 설명을 덧 붙혔읍니다. 

 

내용의 순서대로 이어서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일원적인 靜(고요함,寂靜)에 들면,

그동안 속박되어 왔던 命인 업습(業習)을 절대본체에 반납하고

하늘의 정기(正氣)를 되찾으며,常이 되는데,

이常은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如如한 절대본체인 참나를 말하는 것이죠.

 

항상 있는 그대로 여여한 常이 되면, 明이라는 밝은 지혜(깨달음)를 얻게 되고,

밝은 지혜를 얻으면, 容이라고 표현한 抱容性,즉 불교수행체계에서 말하는 대원경지(大圓境智)를 이루어 모든 것을 다 받아 들이는 자비심을 가지며,

이러한 큰 포용성은 곧 公으로 표현되는 사사로움이 없는 公共性品이고,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성지(平等性智)와 같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여기는 깨달음의 성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여기는 공평한 성품,즉 보편적 존재(普遍的 存在)가 되면,

천하를 관리하는 王이라고 볼 수가 있으며, 

천하의 주인인 王은 곧 神, 하늘이라고 말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 또는 神이 곧 道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읍니다.

 

이렇게 도의 절대본체에 다다르게 되면, 육체는 죽어서 없어지드라도

절대본체인 참나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읍니다. 

이번 장에서는 왕필본을 중심으로 백서본과 기본형이라고 할 수있는 곽점 초간본의 문장들을 몇군데 상이한 부분을 비교 검토해 보면서 몇가지 추정해 보기도 했읍니다.

 

致虛極  守靜篤(치허극 수정독)

致; 이루다,다하다. 虛; 비움, 極; 극진하다,다하다, 守;지키다. 靜; 고요,

篤;도탑다,위중하다.두텁게 하다,진심이 깃들어 있다. 

 

致虛極(치허극); 텅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守靜篤(수정독); 고요함 지키기를 독실히 하면,

텅빔(虛)에 이를기를 지극히 한다,는 말은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는 말입니다만,

마음 속의 욕망이나 집착을 비운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마음의 내용물을 비우는 것이라기 보다는,

"나"라는 개체성을 비운다는 말입니다.

 

즉, 육체를 가진 한 개인이라는 "육체의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죠.

"나"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바로 텅 비우는 것이죠.

"내가 있다"는 존재의 앎이 사라진 상태를 여기서는 텅빔(虛)이라고 합니다.

나는 육체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며, 모양도 없고,속성도 없는 전체에 두루한

無가 되는 것을 여기 도덕경에서는 <虛>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텅빔을 지극히 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개체적인 "나"가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致虛極이라고 虛가 極에 이르다, 라고 했읍니다.

이문장은 "텅 빔을 지극히 하라"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명령어적인 문장은 아닙니다.

노자 자신이 "텅빔을 지극히 하고 있다,"고 자기자신의 명상삼매상태를 표현한 것이죠. 

만일 이것이 "하라"명령어 또는 권고적인 충고라면, 뒤에 이어진 문장에서 吾(나)라는 주어가 나오지 않읍니다. 

단순히 자기자신의 삼매적인 명상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각판본을 비교해 보자면,본 왕필본과 백서본은 글자가 거의 동일하지만,

그보다 이전에 있었다는 곽점 죽간본의 경우는 약간 글자가 다릅니다.

죽간본은,至虛恒也; 텅빔에 이르기를 한결같이 유지한다,

至;致와 같은 이르다,恒; 항상

왕필본과 백서본은 極(완벽하게 이르다)이라고 하여 虛의 質的인 면을 강조하였고, 

곽점본은 恒(한결같이 유지하다)이라고 해서 虛의 시간적 유지를 강조하였읍니다.

 

이 문장의 의미가 상이한 것으로만 단순하게 추측해 보자면,

왕필본이나 백서본의 필사자들은 아직 虛(텅빔)에 완벽하게 다다르지 못한

수행자그룹이 개작(改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듭니다.

왜냐하면 확실하게 "나라는 육체 동일시"를 완벽히 벗어나서 텅 비우지를 못했기 때문에 極에 달하도록 비워야 한다고 목표지향적인 표현을 한 것이죠.

반면에 곽점본의 원저자는 비움을 한결같이 유지한다(恒)는 것은 이미 텅비움이 완벽하게 이루었으므로, 그상태에서 그대로 안정되게 유지만 시킨다,는 현상유지적인 표현을 했으므로, 완전히 나라는 육체 동일시로 부터 벗어나 있는 道人의 견지에서 쓴 것이라고 추측 할 수도 있읍니다만, 단순히 상상일 뿐입니다.

 

도덕경 내용의 수많은 문장에서 곽점본과 백서본,왕필본의 문장구조를 비교검토해 보면, 이러한 차이점을 수없이 발견하게 되는데, 곽점본의 원저자를 도덕경 원래 내용과 가장 유사한 거의 최상위수준에 이른 도인이라고 가정 한다면,

백서본의 개작자는 아주 높은 경지의 수행자 그룹에 속해 있는 구도자로써 자신의 수준에 맞게 원래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수정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왕필본의 개작자도 아주 높은 경지에 익은 상근기 구도자이면서도 문장이나 학문이 꽤 지성적으로 다져진 학자적인 구도자인 것 같은 감이 듭니다.

물론 개인적인 추정일 뿐입니다.

 

守靜篤,고요함(靜)을 지키기를 독실히 한다-는 문장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라는 의미지만,

보통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표면적인 마음이 조용해져서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와는 좀 다릅니다.

이때는 마음이 언제든지 움직일 수가 있고, 항상 마음의 주의가 외부로 외출 나오려고 준비태세에 있어서, 약간의 주위상황만 변해도 마음이 흩으러져서 움직이게 됩니다.

마음의 주의를 깊은 내면속에 잠수해서  가만히 지키고 있으면,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물들지 않은 의식에 접하게 되는데, 그것이 개인적인 마음의 중심이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이 모양도 없고 한계도 없는 의식 속에서 가만히 지키고 있는 것을 "고요함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다"라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이 고요한 의식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면 점차로 의식자체가 사라지면서

감각기관에 의한 반응이 전체적인 자각형태로 흡수되어 "모름(無知)"과 비슷한 상태 속으로 접어드는데, 주변의 환경에 반응하지 않으면서도 깨어있는 듯하고, 반 잠과 반 깨어있는 듯하지만, 아주 마음이 寂靜한 상태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깨어있으면서 적정(寂靜)상태를 계속 확고하게 유지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위 본문에서 말하는 "고요함을 독실히 한다"는 문장의 원래 본뜻 인 것 같읍니다.

 

완전히 "나라는 개체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에는 항상 이 적정(寂靜)상태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으면서, 거기에 안정되어야 하죠.

따라서 텅비움(虛)이 수단이라고 한다면, 고요함(靜)은 목표라고 할 수가 있고,

고요함을 확고하게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완전히 텅 비움이라고 할 수가 있겠읍니다.

따라서 텅비움과 고요는 같은 것이기도 하고,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다르게도 말하지만, 결국 의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의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며, 결국은 虛와 靜은 같은 하나라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곽점본을 보자면,

守中篤也; 中을 지키기를 독실히 한다.- 로 되어 있읍니다.

곽점본에서는 中(가운데)을 백서본,왕필본에서는 靜(고요함)으로 수정한 것이지요.

같은 의식의 내면상태를 처음에는 中(가운데)이라고 불렀고,

백서본 이후부터 靜(고요함)이라고 수정한 것은,

고대 중국역사와 문학을 연구하는 전문학자 들의 이론에 의하면 백서본 형성시기의 전국중기 또는 말기에 유행한 황로학이라는 도가수행체계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미적으로 검토해 보면,

마음의 中心이라는 中자가 표현상으로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中은 바로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깊은 의식내면 중심을 표현한 것이죠.

왜냐하면, 마음은 외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인다는 것은 중심(내면)에서 벗어나서 외부를 향해서 부질없는 움직임의 파동이 중심 바깥의 주변에서 계속 연 이어진 파동흐름이 지속되는 것이죠.

외면에서 마음의 움직임이 계속되는 한에는 마음의 내면인 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죠.

내면 깊은 곳인 中에는 움직임이 없는 오직 고요한 한마음 밖에는 없읍니다.

따라서 中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깊은 내면상태이며, 의식의 중심 속을 의미합니다. 

中은 바로 "지금현재의 현존상태"인 움직임없는 내면의식의 속을 말합니다.

 

반면에 백서본의 靜(고요함)은 의식의 내면상태를 "마음의 고요함"이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고요(靜)라는 표현은 의식내면(中)의 움직임 없는 상태를  마음의 관점에서 표현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겠읍니다.

따라서 靜보다는 中이 내면적인 의미에 가깝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물론 겉표면의 마음 측면에서는 고요(靜)라는 단어가 더 쉽게 이해 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고요(靜)라는 말은 자칫 하면, 보통 개인적인 마음이 잠깐동안 표면적으로 생각의 움직임이 조용해지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 할 수도 있는데,

구도적인 측면에서는 그보다 더 심오한 일원적인 내면 상태를 가리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되겠읍니다.

 

좀 현대적인 쉬운 말로 위의 두구절을 해석해 보자면,

[나라는 개체성을 완전히 비우고, 고요한 내면 속에서 안정되게 지키고 있는다]

이16장에서 이 "텅빔을 완벽하게 하고, 고요함을 안정되게 지킨다"라는 두구절이

가장 중요한 핵심문장입니다. 

[ 완전히 나를 텅 비워서, 고요함을 돈독하게 지키고 있으니]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天道員員) 各復歸其根

(만물병작,오이관복,부물운운,각복귀기근)

萬物: 삼라만상,세상. 竝;나란히,모두,함께하다,아우르다. 

作;짓다,일어나다.일으키다.변화하다. 일을 하다.작용하다.

吾; 나, 觀; 보다,관조하다.復;돌아오다,회복하다,되풀이하다,다시. 반복하다.夫; 이것,대저,

芸芸;사물이 많음,빽빽히 풀이 올라오는 모습. 

 

萬物竝作; 만물은 함께 아울러서 변화하는데,

吾以觀復; 근원에서 나는 이것들이 되풀이 되는 것을 바라보네.

여기서 吾는 "개체적인 나"가 아니라, 절대 본체로서의 진아 또는 참나를 말합니다. 따라서 근원에 머물러 있는 나 입니다.

즉, 앞에서 치허극, 수정독,이 바로 내가 근원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吾는 4장과 13장에서도 절대 본체에 있는 전체적인 참나로써 묘사되고 있읍니다.

以는 앞의 萬物竝作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인 "이것"이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觀은 지켜본다, 復은 되풀이 한다.반복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觀復은 (만물의 생주이멸의 변화가) 되풀이 되는 것을 본다.라고 해석될 수가 있읍니다.

이 觀復을 대부분의 해석서들은 '되돌아 옴을 본다'라고 번역들을 했는데,

그렇게 번역하면, 다음 문장에서도 '만물이 근원으로 되돌아 온다'라는 것이

번복되어 전체 내용이 어색한 구조로 변합니다.

그래서 觀復을 앞의 萬物竝作이 되풀이(반복) 되는 것을 본다,라고 번역했읍니다.

 

竝作은 만물이 함께 아우러져 변화한다,라고 번역을 했는데,

만일 이것을 만물이 함께 아우러져 일어난다, 라고 번역한다면 '생긴다'는 작용만을 표현 할 뿐, 생겨서, 머물러 살면서 소멸하는 작용들은 무시하게 되죠.

그래서 만물의 전체 작용인 生住異滅을 한단어로 대체한 것이 '변화한다'는 단어를 선택 할 수 밖에 없었읍니다.

따라서 [만물이 함께 어울려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연현상을 절대본체의 바탕인 참나 입장에서 바라보니 만물의 생기고 사라지는 변화가 반복된다,]라는 의미죠.

모든 우주삼라만상의 움직임의 변화는 절대본체인 근원에서 생겨나와 다시 근원으로 들어 가는 것이 되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

 

여기서 곽점초간본을 보면,

居以須復也,라고 되어 있읍니다.

居;살다,앉다,있다. 須;모름지기,마침내,기다리다,본래,원래.

復; 반복하다,되돌아오다.

-그 만물이 일어난 자리로 바야흐로 그것들이 되돌아 온다.-라는 내용으로 만물이 일어난 그자리는 절대본체이며, 이것들이 원래 일어났던 절대본체로 되돌아 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의미로서, 문장 안에는 '본다'또는 '안다'라는 단어와 주어가 없지만, 전체만물이 본래근원으로 마침내 되돌아 온다는 수동적인 관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내용같읍니다.

그러나 백서본과 왕필본에서는 절대진아인 吾가 주어가 되어 그런 만물의 되풀이 되는 현상을 바라본다,라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 묘사한 것이지요.

 

절대본체의 참나인 吾의 입장에서 전체적으로 자연적인 주시가 이루어짐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모든 만물은 의식에 의해서 현시되는 것이고, 만물의 생주이멸의 변화는 아무 주체가 없이 자연적으로 흐르는 것이죠.

그러나 그 변화의 양상은 절대근원에서 생겨 나와서, 자연적인 흐름에 의해서 움직이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절대근원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 되풀이 되는 현상을 깨닫는 다는 말씀 같읍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곽점본의 묘사가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夫物芸芸; 이 만물은 무성하게 일어나서

(天道員員); 자연의 만물은 돌고 돌아서

各復歸其根 ; 각자 그 절대근원으로 되돌아 온다.

 夫物芸芸은 원래 백서본에는 天物雲雲

                          곽점본에는 天道員員

으로 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곽점본의 天道가 백서본에서는 天物로 바뀌게 되고,

백서본의 天物이 왕필본에서 天자가 잘못되어 夫자로 바뀌어서 夫物이 되었읍니다.

곽점본의 天道員員은 "하늘(자연)의 이치는 돌고 돈다"라는 의미이고

백서본의 天物雲雲은 " 자연의 만물은 무성히 일어난다"

왕필본의 夫物芸芸은 "전체만물이 무성하게 일어난다"라는 의미로 엇비슷하게 볼 수 있으나, 곽점본과 백서본의 차이는 의미적으로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읍니다.

곽점본의 [자연의 이치는 돌고 돌아서 각자 그 절대근원으로 되돌아 간다]라는 뜻이 백서본에서 雲雲자로 의미가 바꿔지고, 그 후에 왕필본에서도 芸芸으로 글자가 바뀌어 짐으로써 전체문장 의미가 약간 변형되어 버렸읍니다.

곽점본의 "자연의 이치는 돌고 돈다,는 의미는 그 이전 문장인 "근본에서 나는 만물의 변화작용이 반복 되는 것을 본다"라는 내용과 물 흐르 듯 스무스하게 연결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는 이 부분을 곽점본의 天道員員으로 다시 변형해서 번역을 하였읍니다.

그렇게 번역해야 전체 문장의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자연)의 도리는 돌고 돌아서]

전체를 연결해 보면,

[이 온갖만물이 모두 함께 아울러서 변화되는데,

절대본체의 근원에서 나는 이것들이 반복되는 것을 본다.

하늘(자연)의 도리는 돌고 돌아서

만물은 각자 그 근원으로 되돌아 오는구나.]

 

즉 절대본체의 바탕이 되어 만물이 작용하는 현상을 지켜보니,

모든 삼라만상이 절대본체로 부터 일어났다가는 그것으로 다시 되돌아 오고,

다시 절대에서 일어 났다가 절대근원으로 반복해서 되돌아 온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만물은 절대본체에서 한점의 의식이 움직여서, 그 움직임으로 인해 의식이 나타나고, 그 기본 의식에 의하여 사람의 육체감각작용을 거쳐 온갖 세상만물의 다양한 작용이 일어났다가는, 그것들이 다시 의식과 함께 근원인 절대본체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 났다가 사라지고, 를 반복하는 것인데, 일어나는 곳과 사라지는 곳은 다 같은 절대 본체인 하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죠.

 

한사람이 태어나서 의식과 함께 한세상이 나타났다가, 그 육체가 사그러질 때에 의식도 함께 사그러지면서 그와 함께 나왔던 세상도 함께 의식이 나온 절대본체로 합일되는 것이죠.

따라서 그 의식과 함께하는 육체개인은 진정한 나가 아니며, 그것이 그안에서 일어났다가 그 속으로 다시 사라지게 되는 그 근원자체가 바로 참나라는 말씀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 불변의 근원바탕이 바로 참나(吾)라는 것입니다 ! 

 

이문장까지가 원래 곽점 초간본에 있는 원문과 같은 내용이고,

다음 문장부터는 백서본 개작자들이 위의 虛와靜의 개념에 대한 설명 또는 주석을 추가로 덧붙힌 것이라고전문학자들이 말하고 있읍니다.

왕필본 역시도백서본과 동일하게 아래 문장들이 덧붙혀진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아래 문장들은 마치 말끝을 릴레이식으로 계속 이어가는 말장난 같이 보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어렸을 때에 동네 골목에서 부르던 제목없는 동요인,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기차는 빨라-빠르면 비향기-비향기는 높아-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뻣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이어 가기 놀음과 비슷한 형식으로 구성된 글입니다. 

 

歸根曰靜  是謂復命(귀근왈정,시위복명)

歸;돌아오다,돌아가다. 根; 뿌리, 命;목숨,운수,하늘의 뜻,정기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일러 고요함이라고 하며,

이를테면 하늘의 정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命이란 여러가지로 해석 될 수가 있읍니다만,

여기서는 개체적인 한 인간으로 타고난 운명, 즉 인간 습업(習業)을 의미하며,

復命이란 이러한 운명의 굴레인 습업을 절대본체인 하늘에 반납해 버리고,

새로이 하늘의 뜻인 淸靜한 正氣를 받는다는 의미로 볼 수가 있읍니다.

땅의 어두운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늘의 청정한 정기를  받는다는 것이죠. 

절대본체인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을 "靜",즉 고요함이라고 한답니다.

따라서 靜이란 일원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復命이란 여기서는 하늘의 뜻이라고 풀이 했읍니다만, 하늘의 성품,정기라고 풀수도 있겠죠. 또는 신성(神性)이라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원래 하늘의 자리로 되돌아 왔다는 말씀입니다.하늘이란 바로 神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 자신의 神性을 되찾았다는 의미라고도 볼수 있을 것 같읍니다. 

 

復命曰常  知常曰明(복명왈정,지상왈명)

常;항상,늘,떳떳하다. 明; 밝다,깨어있다.

[하늘의 뜻을 회복하는 것을 일러 늘 변함없는 평상심이라고 한다.

늘 변함없는 평상심을 아는 것을 밝은 깨침이라고 한다]

常은 "항상함" "절대 변하지 않는 본체"를 말하죠.

明은 밝음을 말하니깐 지혜의 명료함,즉 진지(眞智)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復命은 神性을 되찾은 것이니깐, 이 神性은 영원불변하는 常이라는 것이죠.

이常을 여기서는 平常心이라고 번역했읍니다.

常이란 절대 변할 수 없는 보편적(普遍的)인 의식을 이르는 것입니다. 

적당한 어휘를 찾지 못해서, 선불교 조사들이 만든 平常心이라는 단어를 잠깐 빌려 왔읍니다. 평상심은 한문글자의 의미 그대로 '평평하고 항상한 마음' 즉, 無心, "아무것도 아님"또는 절대진아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평상심은 보편적의식 또는 우주적 자아를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평상심을 아는 것을 밝은 깨침이라고 했는데, 실제적으로는 절대본체인 평상심은 알수가 없읍니다.

그것은 그자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치고, 그것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알 수 있는 것이라면, 아는자와 아는 대상의 이원화 상태여야 하는데,

常이라는 것은 일원화 절대상태를 말하는데, 안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죠.

절대본체는 통상적인 앎을 초월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知常이라는 것은 常을 안다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常 그 자체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번역은 글자 그대로 '평상심을 아는 것'으로 그대로 번역했읍니다,

왜냐하면 그 뒤문장에 不知常이라고 '모른다"라는 문장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대로 번역은 했읍니다만, 그 "안다,모른다",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무지하다", 는 의미로 바꾸어서 이해하면 되겠읍니다.

 

不知常  妄作凶(부지상,망작흉)

 妄;망령되다,허망하다,거짓, 凶;흉악하다,운수가 나쁘다,재앙

[평상심을 모르면 허망하게 재앙만을 일으키며,]

항상 변함없는 자기의 참본성을 모르면, 즉 無知하면,

꿈같은 환상속에서 그림자만 쫏으면서 흉한 재앙속에서 헤멘다는 말이죠.

즉, 본래의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無知상태에 있으면,

허황한 꿈같은 삶속에서 환상만 쫏아 다니다가 폐인처럼 된다고 말하는 것이죠. 

 

知常容  容乃公 (지상용, 용내공) 

容;얼굴,용서하다, 넣다,담다.쉽다,꾸미다,조용하다.모든 것을 받아 드리다. 

公;공평하다,숨김없이 드러내다.함게하다. 

[자기 참본성인 평상심을 알면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포용성이 되고,

포용성은 곧 사사로움이 없는 공평함이요.] 

 참본성, 즉 평상심이 되면 전체와 일체로서 모두가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자비심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容자를 쓴 것 같읍니다.

容자는 얼굴이나 용모라는 뜻도 있지만, 모든 것을 받아 드린다, 수용한다는 뜻으로 해석했읍니다.

마치 불교 수행체계에서 말하는 대원경지(大圓境地, 전체를 하나로 보는 경지)를 容자로 표현한 것 같은 감이 듭니다.

 

전체가 나라고 여기는 포용력은 바로 "나"라는 개인성이 없는 公共性을 지닙니다. 그것은 公平性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는 公共的 자비심을 가지고 있죠.

이 공평성도 전체에 두루한 보편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죠.

모든 곳에 전체적으로 퍼져 있으며, 언제나 변함없고, 모든 것에 공통된 보편성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 公자입니다.

 公자는 마치 불교수행체계에서 말하는 평등성지(平等性智, 모든 것이 다 같은 의식일 뿐이라는 지혜)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읍니다.

 

公乃王  王乃天 (공내왕 왕내천) 

 乃;이에,곧,너,이전에

[공평함은 곧 천하의 왕이요,천하의 왕은 곧 하늘이요.] 

 이러한 공공심(公共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천하를자기자신처럼 여기는 王과 같다는 것이죠.

王은 천하를 통괄하면서도, 천하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즉 虛 또는 靜으로 변화된 空의식으로 실제 현실세상이 그대로 空으로 반영된  상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王이라고 표현한 것은 마치 불교수행체계에서 말하는 묘관찰지(妙觀察知-세상 모든 사물이 空의식으로 직접 체험되는 앎)를 의미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한 천하와 하나가 된 왕은 바로 하늘, 즉 천하의 神이라고 볼 수도 있읍니다.

 

天乃道  道乃久(천내도 도내구)

 久; 오래다,영원하다.

[하늘은 곧 道이며,道는 영구히 머무르오] 

 하늘,즉 神이란 道이며, 道는 탄생과 죽음이 없이 영원 불멸합니다.

天은 바로 神性을 가리키는 것이며,

인간의식을 초월한 神의 경지입니다.

이 天이란 한글자 표현은 마치 불교 유식학의 성소작지(成所作智-모든 말과 행동이 절대본체 그자체의 움직임이라는 최종적 깨달음)의 경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沒身不殆.(몰신불태)

沒;빠지다,다하다,죽다. 殆;거의,처음,위태하다,해치다.

[육신은 죽드라도,참나는 전혀 위태롭지 않소이다.] 

道를 얻으면 몸은 죽어서 없어지드라도

영구불멸하는 참나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나는  불생불멸의 절대진아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몸이 살아 있는 생전에 깨쳐야지 스스로 영구불멸하는

참나로 되는 것이죠.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 어디로 부터 왔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

또는 道,절대본체라고 하는 명제를 

주어진 환경에서 지성적으로 나마 명확하게 개념적으로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이 내면 깊은 곳에 진리의 씨앗을 심는 것이 되어,

그 씨앗이 적당한 때에 이르르면 서서히

제 스스로 싹을 틔우게 되고,

지속적인 수행과 확고한 믿음, 그리고 성실한 열정의 물을 주면서 가꾸게 되면,

제 스스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뿌리가 깊숙히 뻣으면,줄기도 커지면서,

어느결에 꽃봉오리가 피게 되고,

저절로 열매가 맺어서 걷우게 되는 좋은 날을 맞이 하게 되어 있읍니다.

 

항상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항상 "그것"에 대한 것만 말하고 공부하면,

자연히 "그것"을 위해서만 행동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서서히 "그것"이 되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그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것"이 되어 있어도 "그것"인 줄 모르고,

삶은 항상 맑은 가을 하늘처럼 청정하고 밝읍니다.

누구나 지니고 있고, 언제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그것 !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그것"에서 나오는 축복의 빛이 비치길 바랍니다.

 

이번 16장은 전반부의 곽점초간본과 공통된 부분은 마치 본문같고,

그 후반부의 백서본과 왕필본에만 있는 문장들은 전반부를 보충 설명하는

주석글과 같은  감이 듭니다.

후반부 문장들은 완벽하게 내면의 고요함에 안정되어 있으면, 그상태에서 단계적으로 최종 깨달음으로 변화해 가는 상태를 단 한글자 씩으로 묘사한 듯 합니다.

그러나 곽점본에서는 단순히 마음을 비우고, 내면의 고요함을 항상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 우주 자연의 근본이치를 깨닫는다고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읍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추가된 문장들은 곽점본 시대 이후의 어떤 구도인이 도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최종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적 과정에 대한 주석을 덧붙힌 글이 그대로 전승되어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되기도 합니다.

이 과정을 표현한 글자들이 우연하게도 불교 유식학에서 언급되는 붓다의 네단계 깨달음(四智)과 엇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선불교와 어떤 직간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읍니다만 단순한 상상일 뿐입니다.

끝까지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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