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15장~~~

예암 노마드 2014. 2. 2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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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15장

 [原文]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부유불가식        고강위지용

 

--------2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容(客),

예언   약동섭천      유예   약외사린    엄혜   기약용(객)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환혜   약빙지장석     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

 

--------3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동지서생

 

--------4

保此道者  不欲盈

 보차도자      불욕영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해 석]

가장 오래된 내면 본바탕에 다달은 구도인은 

미세하고 신묘한 기운이 온 우주에 두루 미치오.

 

그 심오한 내면 속을 헤아리기는 어려운데, 

비록 알수는 없지만 억지로 형용해 보겠소이다. 

 

(깊은 삼매로 부터 나오기 직전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마치 겨울철에 개울을 거느는 듯 망서리는 것 같소.

 

(삼매로 부터 나오는 순간에는,)

두리번 거리는 것이 마치 사방의 이웃(감각의식)을 두려워하는 것 같소.

 

(삼매로 부터 나온 직후에는,)

근엄하기가 마치 손님처럼 묵직해 보이는 같소.

 

(의식이 세상으로 펼쳐지니,)

흩어져 퍼지는 것이 마치 어름이 녹아서 풀어지는 것과 같소.

 

(마음이 있는 그대로 거짓없이 반응하니,)

꾸밈없이 순박하기가 마치 통나무처럼 도탑소.

 

("나"라는 자존심이 없으니,)

텅 비워진 것이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낮은 골짜기와도 같소.

 

(마음은 하는 일마다 그것과 하나가 되니,)

뒤섞여 있는 것이 마치 혼탁해 보이는 것 같소이다.

 

혼탁한 세속생활 속에서 고요함과 더불어 있는 것을 능숙하게 익히면,

세속생활의 혼탁함이 서서히 맑아지게 되는 것이오.

 

고요한 수행생활 속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더불어 하는 것에 능숙해 지면,

고요함에 경직된 수행생활이 서서히 활기를 얻게 되는 것이오.

 

이러한 도를 지닌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소.

 

대저 오직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충분히 갈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이룰것이 없소이다. 

 

[해 설]

본 15장은 곽점본에도 있으며, 백서본에서는 59장, 왕필본에서는 15장에 수록되어 있읍니다.

세 판본이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한문글자가 몇개가 다르게 되었지만, 일단은 왕필본을 기본으로 해석을 하고, 왕필본 원문에서 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은 곽점본이나 백서본의 내용을 참고해서 해석을 했읍니다.

이번 장은 절대본체에 도달한 도인이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익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깨닫고 나서 수행 후에 일상 평범한 삶을 살면서 道를 잃어버리지 않고

굳게 다지는 보림과정과 비슷한 내용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보통 일반적인 평범한 삶을 살면서 道를 공부하고 있는 구도자들에게도 큰 도움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도의 최종 목표인 절대본체에 들면 말이나 생각으로는 표현 할 수가 전혀 없읍니다.

절대본체 자체를 이원화적인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하죠.

그래서 깨달은 도인의 마음을 형용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노자는 대략 절대본체에서 나온 의식의 움직임과 변화를 도인의 행동 모습으로 간단하게 묘사를 했읍니다.

7가지의 도인의 행동양태를 표현하고 나서, 수행속의 절대 고요상태와 속세생활의 움직임 상태에서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깨어있음과 속세활동을 같이 병행해서 하는 것을 능숙하게 익혀두라는 충고를 하고 있읍니다.

말하자면 靜中動, 動中靜의 수행을 익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읍니다.

이러한 도를 지닌 도인은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깨어있음과 生의 活氣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中道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죠,

이러한 도를 지니면 더 이상 특별하고 새로운 수행을 할 필요도 없다는 결론으로 우리들에게 수숭한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읍니다.

 

이15장에 대한 왕필본과 곽점본에 대한 기존의 주석서들이나 해설서들이 그동안 다소 그 핵심내용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흐려져서 해석되어 왔던 것 같읍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나름대로 새로운 해석을 내어 놓았읍니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고지선위사자       미묘현통       심불가식

 

古之善爲士者;가장 오래된 내면의 본바탕에 다달은 구도인은- 

古;옛날,선조, 절대본체,도의 바탕.善;착하다,훌륭하다. 道의 최상위 상태.

士;선비,사내,벼슬,군대, 수행자.구도자

古之善; 도의 절대본체, 최종 깨달음. 내면의 본바탕.

 

古之善爲士者를 대부분의 기존 해석서들은 시대적으로 "옛날에 道를 깨달은 선비"라고 주석하고 해석들을 했는데,

노자가 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굳이 옛날 도인의 예를 들어서 옛날 사람에 대해서 언급한다는 것이 좀 어울리지가 않읍니다.

여기서 노자는 지금 현재의 道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그 보편적인 道의 수행과 응용요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지, 그 옛날 과거로 내려가서 옛날에 있던 어떤 도인의 행실을 일예를 들어가며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古之善이란 바로 道의 절대본체를 가리킨 다른 말입니다.

시간에 상관이 없이 아득한 과거부터 지금현재와 알수없는 미래까지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있는 것이라고 해서 중국의 도인사회에서는 절대본체를 일러 古之道 또는 古之善, 태곳적 일이라고 도인사회 안에서만 불렀읍니다.

이전의 14장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執古之道라는 단어도 절대본체를 의미합니다.중국 선불교 초기의 선사들 어록들을 보면 이 "太古의 일"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경우도 바로 최종 해탈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는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 상태" 라고 하며, 자신이 부모들에 의하여 잉태하기 이전의 하루전이나 일년전이나 백년전이나 천만년전이나 천억년전에도 같은 "太古的 상태"인 절대상태가 되는 것이죠.

부와 모가 처음 만나 자신을 잉태하려고 첫 뽀뽀로서 접촉하기 바로 직전에는,

1분전이든, 일억년전이든 자신에게는 아직 시간이란 것이 없이,"하나"의 상태죠.

바로 이 잉태되기 전의 자신의 상태를 절대상태라고 하며,

누구나 지금도 그 "태초상태"를 바탕에 지니고 있읍니다. 

그상태는 무시간, 무공간이며, 모양도 없고,속성도 없지만,모든 곳에 편재해서

전체로서, 그리고 하나로써, 보편성으로서 <그것>이 있읍니다.

그러나 자신이 태어 났다고 믿음으로써 탄생과 함께 시간이라는 굴렁쇠가 굴러가기 시작했고, '나'라는 자기자신과 세상이 나타난 것이죠.

탄생이란 바로 시간이라는 환상의 열차를 탄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주제가 잠깐동안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 버렸읍니다.

 

古之善爲士者는 도의 <절대본체에 이룬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士자는 대략 중국 고대사회에서 선비, 군대,학자, 수행자, 같은 사회의 특수분야의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글자라고 보면 되겠지요.

물론 여기서는 도를 닦는 수행자 그룹을 지칭하되, 가장 높은 경지에 들어선 도수행자 또는 求道者를 가리키는 것 같읍니다.

백석본에는 士자가 道자로 되어 있으므로 道人 또는 道者로 해석해도 상관없읍니다.

 

또 善자는 여기서는 "착하다,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인 일원적인 절대상태를 善이라고 합니다.

道의 입장에서는 전체가 "하나"인 일원적인 상태만이 "善"이고 그 이외에 이원적인 마음은 아무리 착하고 정의롭다 해도 "不善"이라고 말합니다.(제2장 참조)

 

古之善爲士者를 여기서는 좀 더 원문에 충실하게 근접하기 위하여,

-가장 오래된 내면의 본바탕에 이르른 구도인은-

이렇게 번역을 했읍니다.

古之善은 道의 최종근원인 <절대본체>이지만,

의미적으로 이해하기 편리하게-가장 오래된 내면의 본바탕-으로 해석했읍니다.

 

 

微妙玄通 ; 미세하고 신묘한 기운이 온 우주에 두루 미치다.

深不可識 ; 그 심오한 내면 속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微妙;어떤 뚜렷한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미세하고 신묘한 작용.

玄通; 일원적인 절대본체를 깊히 깨달은 상태.또한 전체하늘 또는 우주전체에 신묘한 기운(보편의식)이 두루 편재한다는 의미도 있읍니다.

深; 깊이, 여기서는 의식을 넘어선 깊은 삼매상태.깊은 내면

可識; 능히 알수가 없다. 쉽게 알기가 어렵다.

 

도의 절대본체 속에 잠겨있는 도인은 의식을 초월한 전체가 하나가 되어 있는 삼매상태에 있으므로 겉으로는 어떤 형태나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내면은 아주 미묘한 일원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微妙玄通"이라는 네글자로 표현 한 것이죠.

도덕경 전체에서 이 玄자는 "일원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전체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玄"즉 "캄캄한 모름"으로 표현 한 것이죠.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

그것을 비록 알수 없어도 억지로 형용해 보면,

 

夫唯不可識 ; 그것을 비록 알수는 없었도,

故强爲之容;  억지로 그 모양을 그려 보면,

夫唯; 그것을 비록~ 할지라도.

强爲; 억지로 그려보다. 容; 용모

 

-절대본체를 깨달은 도인의 내면은 미묘하고 깊어서 드러나지 않아 알수가 없겠지만,억지로 그모양을 표현해 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은 도인의 외모나 겉으로 드러난 행동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깊게 감추어진 의식의 움직임을 묘사해 본다,라는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주석이나 해설은 단순히 도인의 외양으로 드러나는 행동양태로 이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읍니다만, 그렇게 해설하면 이 15장은 첫문장부터 노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맨 첫문장에 微妙玄通 深不可識 이라는 것은 도인의 깊은내면을 말하며,

이 내면을 알수는 없지만, 이것을 억지로라도 표현해 본다는 문장 내용에서 도인의 개인적인 행동을 그려 본다는 표현은 없읍니다.

따라서 다음 문장부터 표현되는 도인의 행위묘사는 겉으로 드러난 육체를 가진 개인으로써의 행동 모습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도인의 내면으로부터 나온 의식에 대한 움직임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제 도인의 내면으로 부터 의식이 어떻게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한구절, 한구절 따라가 보겠읍니다. 

 豫焉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儼兮 其若容(客),

예언   약동섭천      유예   약외사린    엄혜   기약용(객)   

 

豫焉 若冬涉川;

미리 머뭇거리는 것이 마치 겨울철에 개울을 거느는 듯 하다.

豫;미리,먼저,머뭇거리다. 焉;어조사. 若; 마치~같다. 冬; 겨울. 涉;건너다.

豫焉; 미리 머뭇거리는 것이

若冬涉川; 마치 겨울에 개울을 건너는 듯하다.

 

글자 그대로 풀어 보자면, 겨울철 개울은 어름이 얼어 있지만, 어름이 단단한지 아니면 얇게 얼어서 혹시나 어름판을 딛고 개울을 건너다가는 어름이 깨져서 개울에 빠질지도 모르므로, 개울을 건너기 전에 어름위로 걸어갈까, 아니면 그만둘까 하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도인의 행동이 밖으로 드러난 외면적인 행위 형태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절대삼매상태에 있다가 의식이 일어나서 이원화 되는 첫모습의 내면 움직임을 그린 것입니다.

의식이 내면에 잠겨 있다가 외면으로 외출 나오는 순간입니다.

도인이 절대삼매상태에서 전체가 하나가 되어 있는 일원화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가, 의식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이원화의 대상인 외부세계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렇게 의식이 외부세계로 펼쳐지기 직전에 마치 겨울의 어름이 언 강을 건널까,

말까 하는 식으로, 의식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한다는 묘사입니다.

절대삼매상태에만 그대로 잠겨 있으면 평안 그자체인데, 구태여 의식이 밖으로 나와 돌아 다니면 본래 자신을 잃어 버리지 않을 까하는 스스로를 경계하고 조심하게 된다는 묘사입니다. 

평안한 삼매상태에서 의식이 일어나 밖으로 관심을 주는 것을 머뭇거린다는 묘사로써,의식이 나오는 첫단계를 마치 보통사람이 겨울철 언 강을 건너려고 머뭇거리는 모습처럼 비유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의식이 마치 깊은 잠에서 바로 깨어나자 마자 맨처음에 일어날까 말까하는 망설임과도 비슷하죠.

일원화 삼매상태에서 이원화된 의식이 일어나는 순간인 것 같읍니다.

그래서 본문해석 앞에 의미적인 설명을 덧붙혀서 해석을 했읍니다. 

[깊은 삼매로 부터 나오기 직전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마치 겨울철에 개울을 거느는 듯 망서리는 것 같다.] 

 

猶兮 若畏四隣 ; 두리번거리는 것이 마치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猶;오히려,가히,머뭇거리다,망설이다, 원숭이. 兮;어조사.

畏;두려워하다,꺼리다. 隣;이웃,근접한.

猶兮; 더구나 경계하는 것이 

若畏四隣 ; 마치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번에는 삼매 속에서 깨어난 의식이 주변에 대해서 경계하는 모양을 묘사한 것입니다.

猶자는 원숭이 猶자인데, 원숭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겁을 먹고 경계하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의식이 일체가 되었던 삼매 상태 속에서 깨어나 의식과 가장 가까운 시각(눈), 청각(귀), 생각, 마음(욕망,쾌락) 등의 육체적 조건에 유혹되어 이끌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비유해서 묘사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읍니다.

다시 말하면 오염되지 않은 무한하고 모양없는 순수한 의식이 육체 감각적인 유혹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경계의 주의를 풀지 못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죠.

여기서 四隣, 사방의 이웃,이라는 말은 이비인후촉의 감각작용 및 육체 조건에 의해서 나탄난 생각등으로 육체적인 마음에 의한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대한 유혹 등을 의미한다고 보면 되겠읍니다.

그것들은 의식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동시에 순수의식을 오염시키는 적(敵)이 될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방의 이웃(감각작용과 마음)에 대하여 적을 두려워하듯이 경계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서 일어날까 말까 하다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밖을 경계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것이 삼매상태에서 의식이 깨어나서 두번째의 움직이는 모습을 스틸사진 찍듯이 묘사한 모습입니다.

이것도 본문장 해석 앞에 의미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번역을 했읍니다.

[삼매로 부터 나오는 순간에는,

두리번 거리는 것이 마치 사방의 이웃(감각의식)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儼兮 其若容(客) ; 근엄하기가 마치 손님과 같다.

儼;의젓하다,근엄하다,공손하다.

儼兮; 근엄하기가, 

왕필본에서 容자는 客자가 잘못 필사된 것으로 전문학자들의 일반화된 의견입니다. 왜냐하면 왕필본에 있는대로 容자로 해석하면 의미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시기적으로 왕필본보다 앞선 백서본과 그 보다도 더 이전에 있던 곽점 죽간본에도 客자로 되어 있어서, 왈필본의 필사자가 베껴쓰는 과정에서 잘못 쓴 글자라고 합니다. 容자와 客자가 형태가 거의 비슷하여 그럴 가능성이 많죠.

그래서 여기서도 客자로 번역했읍니다.

 

이문장도 앞서 절대상태에서 나오자 마자 두리번거리고 망설이던 자세에서

조금 안정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밖으로 (이원화 현상세계) 나온 의식은 이전에 있던 절대 일원화 상태에 여전히 젖어있어서 고요하게 말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죠. 말하자면 아직도 이원화 현상세계에  적응이 안되어 마치 손님처럼 어색하면서도 묵직하게 있으면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묘사같읍니다.

의미적인 설명을 덧붙여서 번역하면,

[삼매로 부터 나온 직후에는,

근엄하기가 마치 손님처럼 묵직해 보이는 같소.]

 

 

전체 7개 의식의 움직이는 모양의 묘사중에서 위의 3개문장은 절대 일원화 상태에서 처음 나오는 이원화 문턱에서의 의식의 움직임을 그려 본 것이죠.

즉, 삼매에서 나오자 마자 의식이 이원화로 진행되는 중간과정이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나머지 4개문장은 의식이 이원화의 현상세계에서 적응해 가는 과정을 사람의 행동 모습으로 그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의 삼매 속에 있다가 속세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환혜   약빙지장석     돈혜   기약박     광혜    기약곡     혼혜  기약탁

 

渙兮 若氷之將釋; 풀어지는 것이 문득 어름 녹아서 풀어지는 것과 같다.

渙;흩어지다,풀리다. 將; 장차,문득,釋; 풀다, 풀리다.

이 문장은 앞서의 문장인 손님처럼 근엄하게 굳어 있던 자세가  마치  연못의 어름이 녹아서 서서히 흩어지듯이 풀어진다는 표현입니다.

절대삼매상태로 부터 이원화 현상세계로 깨어 났지만, 아직 삼매상태에 젖어서 움직일 줄 모르게 굳어있던 의식이 이원화 현상세계에 적응되어, 서서히 단단하게 얼어서 굳은 어름이 녹아서 풀어지며 흩어진다,는 묘사입니다.

이제 의식이 삼매의 방문턱을 나와서 이 현상세계라는 밖으로 외출을 나와서 이현상세계에 완전히 조화롭게 적응하여 풀어진다는 것이죠.

의미에 대한 설명을 앞에 덧붙혀서 번역하면,

[의식이 세상으로 펼쳐지니,

흩어져 퍼지는 것이 마치 어름이 녹아서 풀어지는 것과 같소.]

  

 

敦兮 其若樸 ; 꾸밈없이 도탑기가 마치 통나무같다.

敦;도탑다, 힘쓰다,노력하다.순박하다.

樸; 질박하다.꾸밈이 없이 수수하다.통나무.

앞에서 일단 의식이 현상세계에 완전히 적응하여 조화롭게 풀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 순박하게 도타워서, 마치 다듬지 않은 원목 통나무와 같다,라고 묘사했읍니다.

절대삼매에서 나와서 현상세계에 완전히 적응되어 상황에 따라 어떤 자세로든 변화하고 조화롭게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행위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의미에 대한 설명을 앞에 덧붙혀서 번역하면,

[마음이 있는 그대로 거짓없이 반응하니,

꾸밈없이 순박하기가 마치 통나무처럼 도탑소.]

 

曠兮 其若谷; 텅 비워진 것이 마치 골짜기와 같다.

曠;비다,공허하다,멀다, 넓다,밝다. 谷; 골짜기

의식자체가 순수해서 아무런 개념이나 자기의지가 없으므로 마치 낮은 골짜기처럼 모든 것을 다 받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골짜기는 가만히 있으면서도 주변의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고 말없이 다 받아 들이는 무한한 수용성을 의미합니다.

도인의 마음도 텅 비어서 이현상세계에서 있을 때에 골짜기처럼 모든 것을 말없이 다 수용한다는 것이죠.

이원적인 선택에 의해서 좋아함과 싫어함, 아름다음과 추함, 악과 선 등을 구별하지 않고 전체가 '하나"의 자기자신으로써 마치 텅빈 골짜기같은 빈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말은 "나"라는 에고적 정체성이 없어서, 욕심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曠兮 其若谷-은 원래 가장 오래된 곽점 죽간본에는 없는 문장입니다.

곽점본에는 6개 문장만 나와 있으며, 이문장은 백서본부터 삽입된 것이므로,

중간에 누군가가 나중에 삽입한 것 같읍니다.

백서본에는 맨마지막 일곱번째에 삽입되었는데, 왕필본에는 중간인 여섯번째에 삽입되었네요.

이 하나 하나 도인의 행동묘사는 바로 절대삼매상태에서 서서히 이원화 현상세계로 적응되어 나오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그 순서가 바뀌면 전체를 이해하는데도 영향을 줄수가 있죠.

그러나 이 광혜- 문장은 이원화 현상세계 안에서 절대본체의 특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문장이므로, 아래 네문장 중에서 어디에 놓아도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는 영향이 없는 것 같읍니다.

보충설명을 덧붙혀서 번역을 하면,

["나"라는 자존심이 없으니,

텅 비워진 것이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낮은 골짜기와도 같소.]

 

混兮 其若濁; 뒤섞여 있는 것이 마치 혼탁해 보이는 것 같다.

混; 섞이다,혼탁하다,흐리다,아무렇게나,되는대로. 분별이 안된다. 

濁;흐리다,혼탁하다,더럽다,바보스럽다.우둔하다. 

도의 절대본체까지 깨달은 도인의 의식이 이 현상세계에 내려와서는 "나"라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 꾸밈이 없이 있는 그대로 순박하게 행동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며,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대하면서, 전혀 순수함을 드러내지 않으니,

마치 우둔하기도 보이기도 하고,더럽게 보이기도 하고, 바보스러워서 속세인과 같이 혼탁해 보인다는 묘사입니다.

부딪치며 하는 일마다, 그것과 하나로 혼현일체가 되어 평범한 속세인과 전혀 구별이 안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의 내면은 순수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 밖으로 드러내지를 않을 뿐이죠.

의미적인 설명을 앞에 붙혀서 번역하면,

[마음은 하는 일마다 그것과 하나가 되니,

뒤섞여 있는 것이 마치 혼탁해 보이는 것 같소이다.]

 

위의 7가지 도인의 행동처럼 묘사된 문장들은 보통 해석이나 주석서들이 설명한 것처럼 단순히 도인의 행위묘사가 아닙니다.

절대삼매로부터 깨어나온 의식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7가지로 나눠서 그 의식의 변화과정과 이원화 현상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을 아주 정밀하게 중요 장면별로 각각 마치 스틸사진을 찍어서 순차적으로 배열한 것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위의 7가지 의식의 변화과정을 간략하게 순차적으로 나열해 보면,

* -내면(삼매)에서 깨어 나오는 의식의 문턱에 서서-

1. 절대삼매에서 깨어나 의식이 현상세계로 나오는 순간에 머뭇거리는 움직임.

2. 감각의식과 마음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하는 움직임.

3. 의식이 일어나도 절대삼매에 젖어서 굳어 있어서 아직 고요함을 그대로 지킴.

*-의식이 내면에서 밖인 현상세계로 외출한 이후에는-

4. 현상세계와 하나가 되어 일원적인 의식의 굳어짐이 풀려서 세상과 완전히 조화롭게 적응함.

5.현상세계의 삶에서 아무런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순박하게 살아감,

6.이원적인 현상세계에 살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함.

7. 속세세상과 같이 뒤섞여서 평범한 범인으로서 살아 감.

앞의 1,2,3번은 삼매에서 나오는 순차적인 과정이라고 보더라도,

뒤의 4,5,6,7은 의식의 변화상태이기도 하지만,속세세상에 함께 적응하여 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러면 노자가 왜 이렇게 도의 절대삼매에서 깨어나오는 의식의 변화와 의식이 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묘사를 한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다음 문장에서 명확하게 전해줄 중요한 두마디 메세지를 위해서,

미리 알기 쉽게 실예를 7가지 들어서 순차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제 이15장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다음 문장으로 들어가 보죠.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숙능탁이정지서청       숙능안이구동지서생

 

孰能濁以靜之徐淸;

孰;누가,무엇,어느,익다,익숙하다,숙련하다.能; 능하다,능히~할수있다.능력,

濁;흐리다,혼탁하다,더럽다.以; ~함께,~ 더불어,徐; 서서히,

淸;맑다,깨끗하다.고요하다.

 

먼저 대부분의 왕필본과 곽점본의 해석서와 주석서들이 이 두 문장을 의문문으로 해석한 것이 어째서 잘못된 것인지를 검토해 보고 나서, 이 무한진인이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을 시도해 보겠읍니다.

대부분의 주석서와 해석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문문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한국어 해석 뿐만 아니라, 왕필본과 곽점본의 노자도덕경 주석서들이 이부분을 모두 의문문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누가 능히 이혼탁함을 고요히 가라앉혀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는가?>

해석서나 주석서마다 조금씩 단어의 선택이나 표현에 차이가 나긴 하지만,

거의 위의 의문문식 해석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런데 이문장 하나만 가지고는 의미상으로 전혀 틀린 것 같지가 않지만,

15장 전체 내용을 그 의미적인 흐름의 구성측면에서 전체적으로 드려다 볼 때에는, 왜? 중간에 갑자기 노자가 의문문의 형태를 삽입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읍니다.

더우기 위의 한문 원문에서 1 ~2번 사이가 절대본체상태는 알수없다고 하는 서론으로서 도입부이고, 2~3번은 노자가 무엇인가를 메세지를 주기 위해 도인의 행동양상같은 예시를 7개씩이나 나열하고 나서,

갑자기 3~4번에서는 앞의 7개 행동의 묘사내용을 설명하는 본문형태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때 아닌 밤중에 홍두께 식으로 의문문을 삽입한 것이 뭔가 문장의 논리적인 구성상으로 보면 흐름이 끊긴 것 같고, 전체문장의 조화가 깨져 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더욱이 4번 이하 문장은 결론에 해당되는데, 保此道者 不欲盈(이러한 도를 지닌 도인은 가득 채우려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적인 문장을 연결시켜주는 본론부분에 엉뚱하게 의문문으로 표현했다는 것이  2천여년 동안의 도덕경 해석역사에서 기본적인 주석이 애당초부터 잘못 해석되어 왔던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읍니다. 

 

그런데 백서본의 경우는 이 의문문으로 해석하기가 조화가 안 맞아서 그랬는 지는 몰라도, 앞에 의문문에 해당하는 숙능(孰能)을 아예 빼버리고 원문을 개작했더군요. 그렇다면 이천이삼백년전에도 이문장을 의문문으로 해석을 했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읍니다.

백서본의 원문을 보면,

濁而靜之徐淸(흐릿하다가도 고요히 가라앉아, 서서히 맑아지고)

安以動之徐生(고요히 머물다가 움직여, 서서히 생기를 얻네)

이렇게 孰能을 슬쩍 빼어 버린 것을 보면 원래 의문문형식으로는 그 의미를 명확히 알 수 없으니깐, 아예 숙능을 빼어 버리고 이해한 것 같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앞의 7개 행위 모양과 뒤의 결론적인 保此道者 不欲盈이라는 결론적인 구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중심 서술문으로써는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논리적으로 의미를 이어주지를 못하고, 무엇인가 빠진 것같이 아쉬움이 있읍니다.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해석을 시도해 보았읍니다.

이 문장을 의문문으로 해석하지 않으려면,

우선 맨 앞에 생략된 주어를 새로 붙혀 넣어서 해석을 하면 됩니다.

맨앞에 생략된 주어는  이장의 첫부분에 古之善爲士者(절대본체에 이른 도수행자)가 주어로써 생략 될수가 있읍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士者 또는 道人으로 해서 이 문장 맨앞에 삽입해 보죠.

(道人)孰能濁以靜之徐淸;

이렇게 하면 도인이 주어이고, 孰(익숙하다,숙련하다)이 동사로 바뀌면서,

能(능히~)은 孰(익숙하다)에 붙는 부사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의문문 형식이 보통 서술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濁以靜은 孰의 목적어가 되고,

濁以靜의 뜻은 "고요함과 더불어 혼탁함"으로 번역이 됩니다.

以자가 의미가 다양해서 항상 어디가나 말썽인데, 여기서는 "~함께,~와 같이,~더불어" 의 뜻으로 선택해서 번역했읍니다.

孰자는 고대에 원래는 "익히다,익숙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그 옛날 어느 때부터인지"누구"라는 뜻으로 쓰여져서, "익다.익히다"는 별도로 熟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자시대 때는 아마도 이것이 혼용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孰자는 "익히다,익다,익숙하다,숙련하다,능숙하다"라는 뜻이 사전에 두번째 뜻으로 나와 있읍니다.

 

직역을 해 보면,

-(도인은) 고요함과 더불어 혼탁함에 있는 것이 능숙해 지면, 

탁함이 서서히 맑아지게 된다.-  

여기서 고요함은 절대삼매상태이며, 탁함이란 의식의 이원화상태, 즉 세속생활을 말합니다.

따라서 의미적으로 해석을 붙혀보면,

[혼탁한 세속생활 속에서 고요함과 더불어 있는 것을 능숙하게 익혀서,

세속생활의 혼탁함이 서서히 맑아지게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축소하면,

 -動中靜에 익숙해지면, 점차로 움직임(動)속에서도 깨달음 상태(淸靜)를 유지한다-

는 말씀입니다.

 

이 현상세계의 삶이란 의식의 이원화상태를 말합니다.

의식의 이원화 상태란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눠진 주,객의 두개로 한개의 의식이 나눠진 상태죠.

이 이원화상태를 전체적으로 지켜보는 "말없는 아는 자"가 우리들 배면에 전체적으로 편재해 있읍니다.

그상태는 마음으로 알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양도,어떤 특성도,느낌도 없지만,

모든 것을 아는 "그것"입니다.

우리들의 탄생과 삶과 죽음을 넘어선 그것은 항상 변함없고, 나타나지 않으며,

의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는 근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나 자신입니다. 그것을 깨쳐서 항상 그것과 함께하는 삶이 된다면, 평범한 삶자체가 청정해지면서 모든 것이 나자신의 표현이라는 지복감을 얻게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이는 대상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영원에서 나오는 지복의 청정한 샘물로 살아 갈 수가 있읍니다.

 

혼탁한 생활이란 의식의 이원화 세상을 말하며, 이 혼탁한 세속생활 속에서도

절대삼매같은 일원화의 고요한 삼매상태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라는 말씀이죠.

즉, 복잡한 세속생활에서도 마음을 고요히 가지는 수련을 해서 그런 마음자세가 익숙하게 되면, 일상 활동에서도 점점 청정한 깨달음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죽은 시체처럼 하루종일 눈감고 수행상태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 찌들려서 자신의 본성을 잃어 버리는 상태도 아닌,

항상 깨어서 일상의 평범한 세속생활을 활기차게 하는 것이므로,

극단적인 靜도 아니고, 완전히 오염된 濁도 아니라는 말씀이

뒤에 나오는 결론인 不欲盈(가득 차우려 하지 않는다)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깨쳐야 되겠지요.

 

 

(道人)孰能安以久動之徐生;

[고요함에 안정된 수행생활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더불어 하는 것이 능숙하게 해서, 고요함에 경직된 의식이 서서히 생기를 얻게 되는 것이오.]

 

간단하게 축소해 보면,

-靜中動을 익히면 점차로 靜(고요함)에서도 활기(活氣)를 유지한다-

이 문장의 내용은 이전의 문장내용과는 반대로,

수행속에 뭍혀서 고요함에 안정된 수행생활 속에서도 지속적인 활동을 병행하여 경직된 의식을 활기있게 유지하라는 말씀이죠.

즉, 방안에 앉아서 편안한 수행만을 고집하는 적멸지도(寂滅之道)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수행과 더불어 활동성을 겸하는 능력을 기르면, 삼매상태라도 생생하게 활기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일원적 삼매상태와 이원적인 세속활동을 병행하여 고요함에만 빠지지도 말고,

속세생활에만 유혹되지 않으면서, 항상 중도적인 삶을 살라는 충고같읍니다. 

 

動(움직임,외면)할 때는 靜(고요함,내면)을 유지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動에 있을 때도 서서히 靜일때와 같은 淸(깨어있음,맑음)이 있게 되고,

정(靜)일 때는 동(動)함과 더불어 있는 것을 능숙하게 익히면,

靜에서도 動일때의 활기(活氣)를 生生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외면활동과 내면의식이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청정한 삶을 일상 평범한 생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으로 우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세지입니다.

이것이 노자가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지만,

이천여년동안 언어(의문문)의 흙속에 파뭍혀서 나타나지 않은 보석입니다.

 

저는 이글을 쓰면서 갑자기 태극기의 가운데 태극마크가 연상이 됩니다,

하나의 둥근 원안에 역동적인 형태로 둘로 나누어져 있는 陽(빨강)과 陰(파랑)의 그림에서,

陽(빨강)이 陰(파랑)을 감싸안고 있고, 陰(파랑)이 陽(빨강)을 감싸안고 있으면서

陽과 陰이 서로 감싸 안은채 계속 돌아가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태극마크죠.

빨강(陽)은 파랑(陰)을 품고 있기 때문에 더욱 뜨겁고 動적인 빨강으로 나타나고,

파랑(陰)은 빨강(陽)을 품고 있기 때문에 더욱  차갑고 정적인 파랑으로 보여집니다.

따라서 赤-靑의 전체 태극원이 더욱 力動的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죠.

 

이 노자도덕경 15장에서 말씀하신 動이면서 靜을 품고 있고, 靜이면서 動을 품고 있어서,靜일때는 動의 生氣를 기르고, 動일 때는 靜의 淸(맑게 깨어있음))을 익히라는 수숭한 가르침 말씀이 태극원의 상징적 이미지에 비유될수 있겠읍니다. 

動의 淸(움직임 속의 깨어있음), 靜의 生(고요함 속의 활기기)- 역동적인 우주의 진리입니다.

물론 노자도덕경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의 내용들이 앞으로도 자주 나타날 것입니다. 

왕필본이나 곽점본의 주석서나 해석서들의 일반적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누가 능히 편안함으로서 오랫동안 움직여 주어 서서히 살릴 수가 있겠는가?>

대부분 비슷하게 의문문형으로 해석을 해 놓았읍니다.

 

保此道者  不欲盈; 이 도를 지닌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보차도자      불욕영

保此道者; 이 도를 지닌 사람은

不欲盈;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움직임(動) 속에서도 靜(고요함)의 맑은(淸)정신을 지니고,

靜(고요한 삼매) 속에서도 動의 활기(活氣)를 지닐 수 있는 道人은

극단적인 삼매(靜)의 고요함 속에만 머물러 있으려고도 하지 않고,

극단적인 세속생활인 動의 혼탁함 속에서 타락하여 자기 본성을 잃어 버리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항상 動과 靜을 동시에 품고서 조화로운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 바로 老子의 道인 것 같읍니다.

항상 마음을 맑게 하면서도 일상 생활을 충실히 살고, 자신의 참나에서 떨어져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부유불영      고능폐불신성

 

夫唯不盈; 대저 오직 가득 채우려하지 않으므로,

故能蔽不新成; 이것으로 충분히 갈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롭게 이룰것이 없다. 

蔽;덮다,가리다,싸다,하나로 가름하다.포괄하다,개괄하다,갈음하다.

고요한 삼매 속에 계속 잠겨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고,

靜과 더불어 動, 動과 더불어 靜,깨어있음과 활기를 항상 지니므로써

더 이상 새로운 깊은 수행을 하거나 어떤 희귀한 능력을 얻을 려고 하지 않는다는뜻입니다.

낯에는 남들과 같이 일하며 일생생활 속에서 맑게 깨어있는 정신을 유지하고,

밤에는 고요하게 삼매 속에 잠겨면서도 활기를 잃지 않는 자세로서,

모든 수행을 갈음하므로, 더 이상 특별한 수행행위를 하거나 고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죠.

일상 평범한 생활인이면서 동시에 심오한 도인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선불교 조사인 영가 현각스님의 禪詩 한가락 읊고 마치겠읍니다.

惺惺寂寂是亂想惺惺非

성성적적시     난상성성비 

寂寂惺惺是 無記寂寂非

적적성성시     무기적적비

 

(惺; 깨어있음. 寂; 침묵,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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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음

초롱초롱하고 고요고요해야 하니

망상이 초롱초롱해서는 안되네.

 

그마음

고요고요하고 초롱초롱해야 하니

멍청히 고요고요해서는 안되네.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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