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12장~~~

예암 노마드 2014. 2. 24. 20:17

                                                                               ---노마드---

 

노자도덕경12장

 [原文]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오색영인목맹             오음영인이농         오미영인구상

 

馳騁畋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치빙전협영인심발광               난득지화영인행방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시이성인위복위불목           고거피취차

 

 

[解錫]

 

 온갖 화려한 색채와 모양은 사람들에게 자기내면을 향하는 눈을 멀게 하고,

 

 온갖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사람들에게 자기내면을 향하는 귀를 먹게 하며,

 

 온갖 다채로운 요리 맛은 사람들에게 원래 있는 입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오.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냥 하는 것 같은 오락놀이의 즐거움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는 것이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옳바른 행실을 헤쳐 놓게 되는 것이오 .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의식의 내면을 지향하지,외부의 감각적 자극을 추구하지 않소.

 

고로 성인은 저것(외부 감각적 자극)은 버리고,

이것(마음의 내면)만을 취하는 것이외다. 

 

[解說]

본 12장은 곽점본에는 없는 글이며, 백서본 56장, 왕필본12장에 있읍니다.

백서본 원문과 왕필본 원문은 거의 비슷하므로, 본 해석은 왕필본 원문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이 장은 전체적으로 해석하기에 어려운 한자어휘도 없고,

비유나 상징적으로 숨겨진 의미도 없어서, 비교적 알기 쉬운 문장입니다.

문장 내용도 상식적으로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평범한 내용이지만,

도를 수행하는 구도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장의 요지는 시각,청각,미각에 의한 감각적 욕망과

오락과 재물욕 등의 외부의 자극적인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을 자제하고,

마음의 내면을 향하라는 가르침이죠.

도인은 외부적인 감각적 자극이나 취미,오락등, 마음의 즐거움을 쫏아 다니는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마음의 내면에 안주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五色令人目盲(오색영인목맹)

五色 ; 온갖색갈 과 모양, 모든 시각에 나타난 이미지와 화려한 색채

令 ; 하여금, 하게하다. 令人 ; 사람으로 하여금.

目盲 ; 눈이 멀다.

 

五色이란 색채로만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파랑,빨강,노랑,하양,까망,이렇게 다섯가지 색갈을 의미합니다만, 모든 색채를 오색이라는 단어로도 표현을 하죠.

그러나 이글에서의 오색은 단순히 색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아름다운 형태와 색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시각상으로 눈을 홀리게하는 아름다운 외양과 현란한 색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지요.

 

令人目盲- 사람의 눈을 멀게 하다-는 말은 외면에 나타난 현란한 색채와 아름다운 모양에만 홀리게 되면, 자기내면을 자각하는 마음의 눈이 먼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내면으로 향하는 눈(시선)을 잃어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직역하면, -오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이지만, 의미적으로 말을 다듬으면,

[온갖 색채와 모양은 사람에게 내면으로 향한 눈을 멀게한다]

 

이말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죠.

겉으로 꾸며진 화려한 외모에 홀리게 되면 자신의 내면은 자각할 수가 없죠.

모든 관심이 밖으로만 쏠리면 자기자신을 자각하는 내면의 눈이 어두워져서

자신의 존재를 잃어 버리고 오직 밖으로의 시각적 욕구만을 쫏게 되는 것이죠.

시각의 자극은 오감각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감각이며, 전체 감각의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중요하고 크므로 마음의 작용에 가장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삶의 환경은 너무나도 외면적인 온갖 다양한 형태와 화려한 색채의 유혹에 사람들이 겉껍때기에만 매혹되어 자기 의식내면으로 향하기가 더욱 희귀한 일로 되어 버렸읍니다.

현대사회환경은 상업지향주의적인 이미지 매스 미디어들이 극도로 발달되어 사람들이 외양의 겉모습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시각적인 자극을 유도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뒤돌아 보는 내면의 눈이 퇴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외면적인 겉치레와 허위의식으로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는 반면에,

내면은 실속없이 빈약하고 천박해져서 껍때기 안에서 부패된 상태로 있다가,

간혹 어느날 갑자기 약간의 틈새로 부터  부풀려진 허위상태의 부패가스가 그대로 누설되어 전사회적인 대형스캔들로 폭발되는 경우도 종종 볼 수가 있읍니다. 

볼거리가 화려해지고 시각상의 쾌락을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너무나 발달되어서

현대인들의 내면을 향한 눈은 거의 모두가 완전히 장님이 되어 버리다 시피 된 것이죠. 

 

그러나 마음의 눈인 주의가 내면으로 향하면 화려한 외부적 겉모습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외부적인 볼거리에만 주의와 관심을 쏫는다면, 내면을 향한 자각의 눈은 장님이 된다는 교훈입니다.

자신의 본래성품을 잃어 버린다는 말씀이죠.

 

五音令人耳聾(오음영인이농)

五音; 온갖 아름다운 소리,

耳聾 ; 귀가 멀음

五音은 다섯가지 소리라고 보다는, 온갖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의미합니다.

耳聾은 귀가 고장나서 소리를 못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음악 소리에 홀려서

내면의 소리(침묵)를 들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외부의 감각적인 아름다운 음악에 홀려서 자기내면에 대한 주의의 귀가 멀었다는 말씀입니다.

요즘에 명상음악이라고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정서를 순화시켜 준다는 뉴에이지또는 종교적인 의식의 음악들이 많이 나오고 있읍니다만, 마음을 잠시동안 정서적으로 고요하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질적으로 의식넘어의 명상상태로 진입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는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마음의 정서적인 측면에서 순화되는 느낌은 음악을 듣는 동안 있을지는 모르나,  시간과 마음의 영역에서 조금도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죠.

 

마음 영역에서 벗어나려는 명상은 오직 시간이 끊긴 내면의 침묵 밖에는 없읍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소리는 바로 "내면의 침묵"을 말합니다.

외부적인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감각의 주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온갖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사람에게 내면으로 향한 귀를 멀게한다.] 

 

五味令人口爽(오미영인구상)

五味 ; 단맛,쓴맛,매운맛,신맛,구수한 맛이지만, 여기서는 온갖 다채로운 맛.

口爽 ; 입맛을 상하게 하다.

爽; 시원하다,밝다,굳세다.어그러지다,상하다,밝음.

 

맛의 쾌락은 정상적인 미각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五味란 온갖 맛이나는 음식을 말하며,

口爽이란 '입맛이 상하다,라고 뜻으로 번역될 수가 있겠읍니다.

爽자는 '시원하다,밝다'라는 뜻도 있지만, 어그러지다,상하다'라는 뜻으로 풀면 되겠읍니다.

비슷한 어휘를 예로 들면 '爽實(상실-사실에서 어긋남)'이라는 단어가 있읍니다.

 

번역하면 ,

[온갖 다채로운 맛은 사람의 입맛을 (비정상적으로)상하게 한다]

 

온갖 맛있는 음식만을 선호하면 미각의 예민함이 둔화된다는 내용입니다만,

감각(미각)적 쾌락만 탐닉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口)이 삐둘어진다(爽)는, 표현 같읍니다.

 

어릴 때부터 맛있는 특정음식만을 골라서 먹여 기른 아이들은 그 편식습관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더 약하고 까탈스럽게 고집이 세며, 환경 적응력이 더디고,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더 편협해 질 수있는 경향이 있읍니다.

어릴때부터의 음식섭취의 습관은 자라면서 그사람의 성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죠.

그러나 여기서는 쾌락적 감각의 추구는 실재인 내면의 자성(自性)을 잊어버린다는 의미로 상징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온갖 맛나는 음식만을 탐닉하다 보면 마음이 그러한 감각적 욕망에만 쏠리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미각이 무디어져서 스스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극적인 감각만을 탐닉하는 노예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면 본래자신을 잃어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馳騁畋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

馳;달리다,질주하다,쫏다. 騁; 달리다,펴다. 畋;밭갈다,사냥하다,獵; 사냥하다.

馳騁; 말을 타고 달리는 것. 畋獵; 산이나 들에서 사냥하는 것.

發狂; 미치게 한다. (마음이)홀딱 빠진다.

 

번역해 보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고대에도 사냥은 일종의 스포츠 겸 취미활동이었나 봅니다.

굳이 말타고 사냥하는 것뿐 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놀이와 취미생활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도 하고, 그재미에 푹 빠져서 자신을 잃어 버릴 정도로 미치게 하죠.

 

모든 오락은 단순히 여가생활을 보내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이라지만,

그 속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자신의 존재감을 잊어버리는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스포츠, 오락, 예술감상,바둑 같은 잡기 등 이 모든 놀이는 바로 그 속에서 "나라는 거치장 스러운 존재"를 잊고서 "無時間"과 "無我境"을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즐기고자하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오직 그 대상적인 즐거움 속에 빠져서 자기자각을 잃어 버리는 마음상태가 되므로 외부에다 자기자신을 완전히 내던져 버린 것이죠.

도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기자신을 외부에 홀딱 빼았겨 있는 상태를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로 보며, 윗글에서 미치광이로 취급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각종 스포츠와 취미,오락에 빠져서 자기자신을 잊어 버리고자 노력하는 생활은 일종의 자신을 무지상태로 더 가속화한다고 볼 수도 있읍니다.

이렇게 어떤 쾌락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잊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록, 점점 더 마음의 습관화가 굳어져서, 내면을 향하는 마음의 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내면적 자각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難得之貨令人行妨(난득지화영인행방)

難得之貨; 얻기 어려운 재화, 돈, 재산을 말합니다.

行;다니다,행하다,흐르다. 妨; 방해하다.

해석하면,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실을 헤쳐 놓는다.]

귀한 재화란 돈과 값비싼 보물등, 재산인데, 이러한 희귀한 재화에 대한 탐욕은 무위적인 삶의 길을 가기위한 옯바른 행실을 방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재산이 많으면 그것을 유지하고 안전하게 지키기위해서 더욱 탐욕을 하게 되며, 결국 자기 외부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 보는 자각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죠.

재산 자체는 그렇게 나쁘다, 좋다고 판단 할 수가 없겠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소유욕이 생기고 나라는 개인 에고를 재산을 통해서 강화하고,

재산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내면의 자기를 자각하는 일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재물욕과 명예욕등은 결국은 사람을 타락시킬 수 밖에 없읍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무소유와 모든 행위에서 뒤로 물러나는 수동성과 포용성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무위적인) 도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 형태도 없고, 크기도 없고, 특성도 없는 것이 바로 본래의 나라는 것이지요.

태어날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으며,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 정체가 없는 나,에게는

얻기 어려운 희귀한 재화란 오히려 나에게 방해가 되는 거치장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희귀한 재화는 내면을 지향하는 도수행자의 옳바른 행실을 헤쳐 놓아 방해한다,고 말씀하셨읍니다.

 

是以聖人爲腹不爲目(시이성인위복불위목) 

是以; 이와같이.  復; 배,마음,두텁다,껴앉다. 目; 눈 

爲腹; 직역하면 '배를 위한다'가 되지만, 여기서는 "내면의 마음을 위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不爲目; 직역하면 '눈을 위하지 않는다' 가 되지만 여기서는 '감각적인 외부대상을 추구 않는다'라는 의미로 볼 수가 있읍니다.   

 

爲腹이라는 말은 단순히 육체생리적으로 생존하기 위하여 먹고사는 데만 관심을 둔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마치 육체의 생존을 위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하여 '배를 채운다'라는 의미로 해석한 경우가 많은데, 

이런 번역은 노자도덕경을 완전히 빗나간 사시(斜視)로 보는 자세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爲腹이란 의식외부의 감각적 괘락과 대상들에 반대되는 의미의 의식의 내면을 의미하는 것이죠.

腹자는 배나 위장을 말하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 또는 마음도 의미합니다.  

 

不爲目은 단순히 '눈을 위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위의 본문에서 세가지 감각적 자극욕과 오락적 괘락 및 재물욕의 다섯가지 외부대상을 향한 쾌락추구사항들의 전체를 目이라는 시감각기관의 단한글자로 대표한 것입니다. 

그래서 目은 "외부적인 감각적 쾌락"전체를 의미합니다.

 

해석해 보면,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의식내면을 지향하지, 외부의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른 문장들은 대부분의 해석서들이 거의 비슷한 의미로 해석했읍니다만,

이구절은 좀 다르게 번역되었으므로 다른 해석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그래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가 되지 눈이 되질 않는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먹고 살게는 하지만 감각을 만족케 하지는 않으니>

<그리하여 성인은 기운을 눈이 아니라 배로 향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만 불릴 뿐 감각의 쾌락을 쫏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인은 배만 채우지 눈을 즐겁게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석서들이 腹을 단순히 육체적인 위장(밥통)으로 번역을 한 것 같읍니다. 그러나 배腹(안)은, 눈目(밖)이라는 외부적 감각기관에 비교해서, 상대적인 내면의식으로 배腹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원적이고 육체 동일화 관점에서 해석을 하므로 이러한 간단한 비유적인 상징어들 조차 글자 그대로 '육체적 밥통'으로 해석해 버린 것 같읍니다. 

그 다음구절인 아래 '저것을 버리고, 이것은 취한다"라는 문장에서

'저것'은 외부를 향한 감각적 자극이고, '이것'은 내면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만일 '이것'이 배腹이라면 성인은 배만 채우는 돼지나 개와 다를 바 없다는 코메디 수준의 말이 되는 것이죠.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故; 그러므로, 연고,까닭, 去; 가다,버리다,물리치다. 彼; 저쪽,저(것),그(것),

取; 가지다,취하다.此; 이(것),여기,이에.

여기서 彼(저쪽)은 의식내면에서 바라본 외부 감각적 쾌락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此(이쪽)은 의식내면 그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래서 해석해 보면,

[고로 저것(감각적인 쾌락)을 버리고, 이것(의식내면)을 취한다.]

 

이글에서 볼 수 있듯이 도덕경은 항상 내면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내면적인 자세에서 해석을 해야죠.

이것(此)는 바로 지금 여기의 내면인 절대본체 쪽이라는 뜻이고,

저것(彼)는 저쪽 바깥의 감각세계,즉 현상세계를 의미합니다.

도덕경은 항상 이쪽인 안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저쪽인 바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원화 세계인 이 현상적 측면으로 보면 거꾸로 전도 된 입장이 됩니다.

 

그러나 도덕경을 읽는 관점은 항상 도의 본체인 절대의 관점,

즉 내면의 입장에 서서 읽어 보아야 옳바른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는 것이죠.

이원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오직 일원적인 전체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어떻한 시비꺼리도 있을 수가 없읍니다.

모든 논쟁은 마음이 분열된 이원화 입장에서만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시비나 논쟁은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도 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논쟁이나 시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꾸 빠져 들어 가고 싶은 경향이 나타난다면,

하루속히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을 스스로 자각해서 치료해야 되겠지요.

두뇌를 고요하게 침묵시켜서 뇌세포에 끼어있는 거품들을 스스로 꺼지게 하는 침묵의 명상기법이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원적으로 분열된 정신상태에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적인 논쟁과 시비에 대해서는, 일원적인 상태에서는 거의 무관심하여 무시될 수 밖에 없읍니다.

선불교의 3조 승찬대사의 심신명(信心銘) 첫번째 구절입니다.

 

지극한 道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오직 간택(揀擇)함만 꺼릴 뿐이요,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저절로 단번에 명백해 지니라.

 

도덕경은 오로지 일원적인 인간 의식의 깊은 내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며,

그 깊은 내면의 본체를 道라고 하고,

그 道가 의식을 통해서 작용하는 양상을 德이라고 하며,

道의 본체를 스스로 파악하여 일원적인 입장이 되어 있으면,

자연히 그 행위와 자세는 德의 작용이 되는 것이죠.

 

감각작용으로 나타난 모든 것은 외부의 이원적인 현상에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고 알수없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내면에 있는 일원적인 전체상태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저것(外)을 버리고, 이것(內)만 취한다. 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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