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11장~~~

예암 노마드 2014. 2. 24. 20:12

                                                                              ---노마드---

 

노자도덕경11장

[原文]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삼십폭공일곡              당기무         유차지용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약호유이위실             당기무         유실지용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유지이위리            무지이위용

 

[解釋]

 

 서른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는데,

그 바퀴통 속의 텅빔(無)에 의하여 수레의 쓰임이 있는 것이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안의 텅빔(無)에 의해서 그릇의 쓰임새가 있는 것이오.

 

집에 구멍을 뚫어서 창문을 내는데,

그 문틀의 빈공간(無)으로 인해서 방안의 쓰임새가 있는 것이오.

 

그러므로,

"있음(有)"의 유익함은 "없음(無)"의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외다.

 

 

 

[解說]

본 11장은 곽점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서는 55장, 왕필본에서는 11장에 해당합니다.

백서본과 왕필본의 글자들은 거의 비슷하지만 몇개의 글자가 달라진 것이 있어서, 일단 왕필본 원문을 기준으로 해석하되, 백서본과 다른 글자가 있는 문장만 따로 비교해서 해석을 해 보았읍니다.

이번 장은 비교적 번역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어서 대부분의 주석서와 해석서들이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읍니다. 

그래서 문장해석은 간단히 언급하고, 문장 속에 감추어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파헤치는데 주력하였읍니다.

 

이 11장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있음"이 쓰여지는 것은 "없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도 있으나,

내면에 감춰진 상징적인 의미는,

이 나타난 전체의 현상세계가 절대본체의 작용인 순수의식의 無로 인해서 운행된다는 것을 비유한 내용입니다.

즉, 이현상계 전체를 시간, 공간, 사람,이라는 세가지로 나눠서,

각각 수레바퀴, 그릇, 방,으로 비유하여 모두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無에 의하여 운행된다는 내용입니다.

 

첫째줄의 수레바퀴는 시간의 움직임이며,

그회전하는 것이 바로 의식의 파동성을 상징합니다.

회전하는 바퀴는 이 현상세계 전체의 운행을 상징한 표상물이죠.

그 바퀴 중심의 바퀴통 속 텅빔(無)은 의식이 없음(시간없음)을 의미하죠.

시간의 흐름은 의식중심부의 시간없음(無)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의 구절인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것은,

"공간"의 사용을 상징한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의 쓸모있음은 "존재없음"에 의하여 효용성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각 개체에 스며있는 無가 그개체가 작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죠.

절대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 펼쳐져 있으며, 모든 만물이 쓰임이 있다는 것은

결국 이 無의 작용에 의해 그 쓰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숨겨진 의미는,

사람이 육체(有)를 가지고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은 육체 속에 깃든 無(텅빔의식)로 인해서 살아 있을 수가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읍니다.

 

세번째는 벽으로 밀폐된 방에 구멍을 뚫어서 문을 만들므로써

방이라는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의 용도가 될 수 있듯이,

따로 떨어져 고립된 육체개인(有)은 텅빔의 창문(無)을 뚫어서 전체空과 일체가 되어야 전인적 인간으로써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문이란 절대본체와 연결되는 구멍으로 바로 순수의식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11장은 백서본에는 나와 있지만, 곽점초간본에는 빠져 있읍니다.

이렇게 심오하고 상징적 비유묘사가 탁월한 내용이 곽점본에 빠져 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곽점본과 백서본 사이에 원본을 쓴 노자도인에 버금가는 탁월한 또 다른 도인이 곽점본의 질박한 내용을 보완했다고 볼 수도 있겠읍니다.

 

 

이제 본문을 해석해 보겠읍니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輻;바퀴살, 몰려들다, 共; 한가지,함께, 轂; 바퀴통, 

 當; 마땅하다,밑바탕,이,저, 맡다. 대하다.

 

三十輻共一轂 ; 서른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뀌통에 모이는 데,

當其無 ; (그 바뀌통 속의) 없음(빔)에 의해서

有車之用 ; 수레가 쓸모(움직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해석해 보면,

[서른개의 바퀴살이 한개의 바뀌통에 묶여는데,

그 바뀌통 속의 텅빔(無)에 의해서 수레가 굴러갈(用) 수 있는 것이다.]

 

바퀴살들이 바퀴 중심에 있는 바퀴통에 모여있는 것은 둥그런 바퀴 테두리가

수레의 무게에 찌그러져서 변형되지 않도록 단단하게 지지해 주기 위한 바퀴의 뼈대라고 할 수 있으며, 바퀴의 기본 구조이죠.

그리고 이 바퀴살 지지대를 중심에 묶고 있는 바퀴통은 바퀴가 자유롭게 회전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가운데 축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어야 되겠죠.

그래서 회전하는 바퀴의 중심부에 있는 바퀴통의 가운데 구멍을 여기서는 無로 본 것입니다.

이 바퀴 가운데 구멍(無)이 없으면 바퀴가 회전하지 못하므로 수레로써의 기능이 없는 것이죠.

 

물론 요즘에는 바퀴통이 구멍이 없고 축이 연결되어 축자체가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자동차의 트랜스 미션처럼 동력전달장치가 있기는 하지만, 위의 노자 말씀은 고대 중국의 단순한 수레바퀴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뢰바퀴란 바로 움직이고 회전하는 것의 상징물입니다.

우주삼라만상의 진행은 시간의 움직임이며,

이 움직임의 언어적 상징으로 30이라는 숫자를 슬쩍 끼어 놓았고, 

회전하는 운동이 기본기능인 바퀴를 내세워서 이 우주삼라만상의 운행의 기본 요소인 <시간의 진행>이 전체 우주의 중심에 있는 無(텅빔)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는 메세지를 알려 주려고 한 것 같읍니다.

  

바퀴 중심부의 구멍(空)은 이 전체 우주의 虛空과 통하는 것으로 바퀴자체가 가지고 있는 우주허공입니다.

바로 그 우주허공이 바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그 작은 구멍은 바퀴의 심장부이며, 바퀴의 생명이며, 바퀴의 존재근원이라고 묘사할 수도 있읍니다.

30개의 바퀴살이 있는 회전하는 수레바퀴는 이 우주삼라만상의 운행을 표상한 것이고, 그 가운데 텅빈 구멍은 道의 절대본체를 상징한 것이죠.

 

이 우주삼라만상은  의식의 중심에서 투사되는 파동의식(地水火風空)의 움직임입니다. 의식의 중심이란 바로 의식이 생겨 나오는 지점을 말하며,

내가 있다는 앎이 시작되는 점입니다.

이지점이 의식의 중심이며, "나"라는 의식이 절대쪽으로 사라지는 점이기도 하죠.

마음이 고요해지면 자연적으로 마음 넘어로 건너가게 되고,

의식이 空인 상태가 옵니다.

생각이 전혀 없는 전체가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지금여기'라는 의식의 중심입니다.

 

그 의식의 중심에서 이 현상세계가 나타납니다.

그 의식의 중심과 그 중심에서 나오는 파동성의 의식들이 소용돌이 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법륜, 수뢰바퀴,또는 만다라라고 하는 상징적 그림들 입니다.

그 중심의 空을 "지금 여기"라고 하죠.

모든 사람이 "지금 여기서" 그 중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시간의 흐름은 의식중심부의 시간없음(無)으로 인해서 시간이 흐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레바퀴의 상징화는 인도 흰두교에서 기원전 3천년이상이 된 상징적인 표상이며, 이 수레바퀴의 표상을 불교에서 그대로 채용하여 법륜(法輪)이라고 하여, 석가부처가 법문을 할때도 법륜을 돌린다는 표현을 썼읍니다.

그러나 원래는 삼사라(우주삼라만상의 운행)를 상징화한 표현입니다.

 

이 수뢰바퀴의 상징이 더 발전되어 평면적 도형인 만다라로 발전하였으며,

가장 많이 알려진 티벳의 대일여래 만다라 같은 그림들은 모두가 이 수뢰비퀴를 기본으로 중심부에 최고부처가 앉아있고, 그 중심 주변에서 점점 동심원이 커지면서 의식적으로 점점 파동성이 강해지는 쪽으로 바캍쪽으로 동심원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죠.  

만다라 그림은 현상계의 삼계(욕계,색계,무색계)와 초월계(중심)를 한평면에 이미지로 상징화 한 종교화입니다만, 의식측면에서 보자면 의식의 생성과 파동적인 펼쳐짐의 과정을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는 참고도형으로도 손색이 없읍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사람의 뇌속에도 아주 미세하여 보이지 않는 바늘구멍 만한 빈공간이 있는데,

뇌의 가장 중앙 상부에 '부라마 란드라' 공간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의식의 중심이며, 의식이 활성화 되는 공간으로서 모든 의식이 이곳에서 공진되어 집약되어서 오른쪽 가슴의 진아의 자리로 내려가 진아로 합일된다는 명상가들의 이론도 있읍니다.

의식의 중심이 바로 이 뇌가운데 상부에 있는 미세한 공간인 부라마 란드라일 것이라는 느낌은 오랜 수행을 한 상근기 명상가는 충분히 체험을 할 수 있읍니다.

이곳이 의식의 홀로그램이 펼쳐지는 존재의식의 육체적 자리라고 고대 인도의 요가계통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읍니다.

 

수레바퀴의 이미지는 의식의 홀로그램을 아주 단순화한 것이죠.

물론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만다라도 결국 의식의 홀로그램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읍니다.

전우주삼라만상의 작용이 의식의 홀로그램 안에서 단계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도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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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1 법륜                            그림2 만다라                그림3 수레바퀴 은하계

 

그림1,은 불교의 법륜으로써 인도의 흰두교에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중심부 구멍이 비어있으며 그 주변에 연꽃무늬가 있죠.

가운데 중심이 빈 구멍이 부처의 자리이며, 그다음 원통이 바로 순수존재의식을 상징합니다.

가장 바캍의 바퀴테두리는 축생, 그다음이 지옥, 그런 순서로 중심에서 멀어질 수록 의식의 파동성이 거칠어 진다는 것이죠. 시간과 공간이 모두 포함된 삼사라(우주 삼계)가 바퀴이며, 가운데 빈 구멍이 부처의 자리입니다.

 

그림2,는 티벳트의 대일여래 만다라입니다. 저 그림을 보며 명상하는 명상도구입니다.

중심부에 부처가 앉아 있죠.

네모나고 사방에 문이 나있는 범위(에리아)는 인간계를 의미하는 것 같읍니다.

네모 밖은 축생계,아귀계,지옥 등이 있읍니다.

큰원자체가 우주삼라만상이죠.

이만다라는 그림1의 법륜을 평면화해서 명상도구로 만든 것이죠.

 

그림3,은 우주 은하계에 실제로 있는 수뢰바퀴처럼 회전하는 은하계를 허불망원경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은하계도 정신계처럼  비슷한 원리로 핵홀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돌고 있읍니다.

중심핵홀이 화이트 홀인지 불랙홀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극히 고밀도의 작은 허공이 있다고 합니다.

그 작은 허공이 고밀도로 되어있어 엄청난 힘으로 은하계안의 여러별을 끌어 잡아 당기고 있어서

주변이 모든 별들이 핵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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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埏;땅 가장자리,이기다. 埴; 찰흙,진흙,점토. 爲; 위하다,만들다. 器; 그릇,도구

 

埏埴; 찰흙을 이기는 일 (그릇을 만드는 일).

埏埴以爲器 ;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當其無 ; 그 그릇의 없음(테두리 빈공간)을 바탕으로

有器之用; 그 그릇의 쓰임새가 있다.

 

그대로 연결해 보면,

[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그릇안의 텅빔(無)에 의해, 그릇의 쓰임새가 있다.]

 

찰흙을 이겨서 평평한 접시를 만들든, 아니면 호리병처럼 주둥이가 좁은

병을 만들든, 그것이 그릇으로 쓸수 있는 것은 그릇안의 공간에 무엇인가를 담을 수가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그릇이란 우주전체공간과 밀폐된 텅빔이 아니라, 우주공간에 개방되어진

공간을 말하며, 찰흙에 의해서 가장자리가 있는 형태에 담긴 빈공간을 그릇으로 쓸수가 있는 것이죠.

즉 그대로 있는 공간을 찰흙으로 일정한 작은 구분을 만들어 자연공간자체를 활용하는 것이 그릇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죠.

접시라는 有의 쓰임새는 결국 無인 전체공간때문에 가능하다는 요지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릇이라는 용도가 그릇안의 작은 공간의 빔(虛) 때문에 쓸수 있다는 사실을 묘사한 것 같지만, 실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읍니다.

 

작은 접시가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은 사실 전체 우주삼라만상과 통해있는 같은 공간입니다.

작은 접시의 오목한 공간이 바로 우주허공 그자체이며, 그것은 바로 道의 본체 그것이라는 메세지입니다.

진흙으로 만든 접시형상자체는 그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릇의 기능을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접시의 형상자체가 공간자체를 잠깐 빌린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진흙으로 만든 접시형상과 그안의 공간자체가 전부 전체공간 그자체라고 할 수가 있죠.

따라서 無의 전체공간입장에서는 그릇이나 그안의 작은 공간이라는 것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이 전체가 항상 無이지만,

有의 입장인 접시관점에서 보자면 접시가 가지고 있는 작은 오목히 들어간 접시공간은 접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접시의 용도이며 존재가치죠.

 

이세상의 모든 형체가 있는 것들은 허공을 잠깐동안 빌려서 점유(占有)한 것일 뿐이며, 그 모양에 의해서 특이하게 형성한 자기공간을 차용해서 쓰고 있는 것이죠.

사람의 육체도 잠깐동안 공간과 시간을 빌려서 나타났다가 원래 전체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기그릇이 깨져서 그릇으로써의 제구실이 끝나면 그것은 그저 허공안에 있지만

그릇으로서의 제구실을 못하기 때문에 그릇으로써의 존재는 없어지고 전체허공과 같이 된 것이죠.

그러나 자신이 원래 허공이라고 여겼다면, 그릇으로서의 존재하든, 깨져서 그릇노릇을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오히려 본래 자신인 전체허공을 유지할 겁니다.

공간은 두루 어디든 존재하는데, 절대본체의 無도 어디든 두루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有는 有이면서 동시에 無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육체(有)이면서, 동시에 전체(無)이기도 하죠.

육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개인이고, 전체 공간적(의식적)입장에서 보면

無이기도 하죠.

따라서 道의 본체인 절대관점에서 보면 개인이란 없읍니다.

이렇게 有입장에서는 전체가 有가 되어, 모든것이 개별화로 구분지어 보게되어

보는자와 보여지는 대상인, 주,객의 이원화로 나누어지지만,

無입장에서는 전체가 無가 되어, 모든 것이 하나로써 일체로 보게 되며,

오직 일원적인 전체의 하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無를 바탕으로 有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有)를 가지고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은 육체 속에 깃든 無(텅빔의식)로 인해서 살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백서본과 왕필본을 비교해 보겠읍니다.

백서본 然埴爲器

왕필본 埏埴以爲器

백서본의 然자는 '그러할' 然자인데, 이然자에는 통상 쓰는 의미이외에

불사르다,굽다,라는 뜻의 燃과 通字가 되는 사용경우도 있읍니다.

따라서 '찰흙을 불에 굽는다',라는 의미에서 '찰흙을 구어 그릇을 만든다',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겠읍니다.

然자를 破字해 보면, 밤중에(月) 개(犬)를 불(火)에 굽는다,라는 의미가 있죠.

그옛날 중국관습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밤중에 개고기를 구어 먹는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글자(然)를 보면 개고기 먹는 관습이 무척 오랜 고대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이외에는 왕필본에 以(연결조사)가 붙은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군요.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 뚫다,파다, 戶; 집,구멍,출입구. 牖; 들창,깨우치다. 室; 집,방,굴, 

鑿戶牖 ; (벽을 뚫어서)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當其無 ; 그 방 문틀의 텅빔으로 인해

有室之用 ; 방으로써의 쓰임새가 있는 것이다.

 

[벽을 뚫어서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문틀의 텅빔(無)으로 인해,방의 쓰임새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처음에 벽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공간에 벽에다 구멍을 뚫어

출입문을 냄으로써 밖에 공간과 유통되게 함으로서, 밀폐되었던 공간이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방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 할 것은,

當其無의 無는 밀폐된 공간의 방이 아니고,

門 자체의 구멍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門을 방의 벽이라는 有의 상대적인 의미로,

벽(有) 안에 있는 無(구멍)로 표현 한 것이죠.

이 문이라는 구멍(無)이 있기 때문에 벽속에 밀폐된 방의 공간이

쓸모가 있게 된다는 말씀인데,

만일 문이 없는 벽으로 밀폐된 방이 있다면, 그 방의 공간이 있더라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방을 사용할 수 있는 원인은 벽에 뚫린 門때문에 사용가능한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노자도인이 말하고자 하는 깊은 핵심은 방과 문이 아니라,

개인육체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말한 것이죠.

벽으로 밀폐된 방을 개인으로 비유한 것이고,

창문이라는 구멍은 전체우주공간과 소통 할 수 있는 순수의식(無)을 말합니다.

 

사람이라는 육체를 가진 개인은 전체 세상과 하나인데,

그 개인자체는 자신이 독립되어 있다는 개체에고의식을 가지고 있죠.

이 개체적 에고 상태가 바로 벽으로 밀폐된 방과 다를 것이 없읍니다.

이러한 전체와 따로 떨어져서 폐쇄된 에고는 상대적인 이원성으로써

모든 것을 남으로 대하므로 공격적이고, 분리적이며, 투쟁적이고,이기적이 되는 것이죠.

 

개인이라는 에고의식이 전체 무한한 道의 본체와 소통이 되어서 해소되어야지 비로소 전인적 인간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원래 전체와 소통 될 수 있는 道의 門이 열려 있읍니다.

다만 이 도의 문이 열려 있어서 자신의 공간이 바로 전체 우주공간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수궁하면 자신이 바로 도의 전체 공간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노자도인은 밀폐된 방안 문의 구멍을 뚫음으로써 그 방(에고)이 쓸모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로 떨어져 고립된 육체개인(有)은 텅빔의 창문(無)을 뚫어서 전체空과 일체가 되어야 전인적 인간으로써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문이란 바로 道와 통하는 구멍, 즉 순수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을 無라고 표현한 것은 마음을 벽으로 비유하고, 움직임 없는 마음, 즉 순수의식(平常心)을 마음이 없는 無(창문)로 비유한 것이죠.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利; 이롭다,유익하다,편리하다,통하다.날카롭다,날래다,탐하다.

 用;쓰이다,쓰다,작용,효용,일의 진행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로울 수 있는 것은 "없음(無)"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있음(有)이란 본문에서 "수레,그릇, 방" 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시간,공간,사람"이라는 이현상세계 전체의 삼라만상 내용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없음(無)은 본문에서는 "바퀴통 중심, 그릇의 오목한 공간, 문틀공간"을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절대본체와 연결되는 순수의식의 空"을 無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고 속성도 없는 상태를 無라고 하는 것이죠. 

時.空.人. 또는 天.地.人은 바로 모두 無(道)의 작용에 의해서 나타나고 운행이 된다는말씀 입니다.

 

이번 11장은 원문자체를 번역하는 데는 그리 어려운 점이 없지만,

내면에 감추어진 상징적인 핵심의미가 겉으로 드러난 의미보다도

더 심오하다고 판단하여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의미를 이끌어 내는데

촛점을 두어 작성했읍니다. 

                                                                             ---노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