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10장, 구도 수행자의 자기수양 점검 ~~~

예암 노마드 2014. 2. 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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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10장, 구도 수행자의 자기수양 점검 

[原文]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재영백포일          능무이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生之  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생지   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이현덕

 

 

[解釋]

 

우주의식 안에 잠겨서  전체세상과 일체가 되어,

거기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운(주의)을 오롯히 하여 마음의 움직임이 그쳐서,

젖먹이 아이처럼  될 수가 있겠는가?

 

마지막 미세한 습성마저 제거하고 깊은 내면바탕에서 주시하여

아무런 허물도 없을 수 있겠는가?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이 된다면,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도 능히 다스릴 수 있겠는가?

 

영안(靈眼)이 열려서 신묘한 신통력이 나타나면

그것에 이끌려서 약해지지 않을수 있겠는가?

 

뚜렷하고 밝은 앎이 사방으로 두루 통달해져도

억지로 일삼지 않고 무위로써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의식은 온갖 만물을 낳고, 기르는데, 

 

낳으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보살피면서도 그결실을 기대하지 않소. 

 

온갖 것의 어른이면서도 만물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덕이라고 부르는 것이외다..

 

 

[解說]

이번 10장의 내용은 도 수행자들, 즉 상근기의 구도자들이 자기점검을 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수행의 이정표를 제시해 주는 내용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도를 닦는 수행자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내용입니다.

 

도덕경 전체내용 중에서 이10장도 주석이나 번역상으로 가장 다양하고 말썽이 많은 곳 중의 하나로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내용 중에 하나인가 봅니다.

어떤 주석은 양생론의 입장에서 주석을 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국가지도자의 경영지침정도로 해석하는 데도 있읍니다.

각문장마다도 해석이 다양하고 특이하게 해석되는 부분이 많읍니다.

무한진인은 항상 변함없이 도 수행의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있읍니다만.

그런데 도덕경은 도 수행의 관점 이외에는 다른 측면에서 주석이나 번역을 하려면 거의 상상력이 대단하게 풍부해야 될 것 같읍니다.

 

전체내용을 일괄해 보면,

위의 원문을 기준으로 첫째줄 세문장은 구도자가 수행중에 순수의식상태에 안정되기 위한 점검사항이며, 일종의 수행 요령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이 세가지 점검사항에서 완벽하다고 여기면 대략 도인의 임시 자격증을 교부받을 수있읍니다.

 

그다음 두번째 줄의 세문장은 구도 수행이 끝나고 일반사회에 나와서

보통사람과 같이 섞여 살면서 보림수행을 하면서 점검하는 사항입니다.

즉, 도인으로써 세속에 뭍혀 살면서도 어떤 상황에 맞 부딪치드라도 무위적인 도인자세를 흩으러지지 않도록 하는 자기점검사항입니다.

여기서는 정치와 신통력과 지성의 활용, 세가지 상황에 대한 주의 사항입니다.

 

세번째줄은 얼뜬 일견하면 첫째,두째줄의 문장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듯 하지만,

실은 앞의 두줄의 자기점검상태외에 도인의 무위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것이죠.

이세번째 내용은 앞서 제2장에서 자연의 작용에 관한 문장이 그대로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즉, 도인의 무위적인 삶은 바로 자연의 운행형태와 같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무위적인 도인의 행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여러점검 사항들은 구도자가 굉장히 높은 경지까지 간 상근기 구도자들에게 해당되는 점검사항입니다.

물론 이것을 지침으로 공부할 수도 있읍니다만, 보통 선불교 조사들이 말씀하신

자기점검사항과 비교해서 특이한 내용은 아닙니다.

수행방편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전체 수행체계에서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이므로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편입니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載;싣다,기록하다,가득하다,비롯하다.타다,오르다.행하다,꾸미다.

營 ;경영하다,짓다,꾀하다,계획하다,변명하다,두려워하다.재다,현혹하다,갈  다,진영,집

魄 ; 넋,몸,모양,달,달빛,재강,찌기,넓다,영락하다.

抱; 안다, 품다,던지다, 가슴,아름

能; 능하다, 능히 할 수있다,견디다, 능력,재능,

離 ; 떠나다,떼어놓다,갈라지다,분리하다.

乎 ; 어조사

 

이 영백의 의미파악이 이문장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주요한 열쇄입니다.

營魄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넋의 거주처, 또는 넋의 테두리 정도로 대략 짚어 볼 수가 있겠읍니다.

넋이란 정신을 말하며, 곧 의식을 말하므로,

의식의 거주처 또는 의식의 경계 범위 내에 있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온갖 의식이 그 안에 들어 갈 수있는 거주처 또는 울타리 안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營자가 들어가는 한자 단어 중에 영견(營繭)이라는 어휘가 있읍니다.

繭은 누에고치 견자인데, 이뜻은 누에가 고치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는 것,

즉  자기 스스로 실을 뽑아 고치집을 만들면서 그 고치집 속에 들어앉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이 누에가 고치라는 집 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듯이,

營魄이란 말도 의식(넋)의 집속으로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그러면 의식의 집 또는 영백이라는 그 넋의 테두리(범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 나타난 현상세계인 우주전체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載營魄은 "宇宙意識에 잠겨서(실려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營자는 집이나 어떤 울타리안을 의미합니다.

軍營,鎭營등의 단어가 있죠.

宇宙란 단어 역시 집宇, 집宙라는 단어로 구성된 현상세계의 전체집을 의미하죠. 

그래서 營魄을 宇宙의식으로 해석했읍니다.

즉, 우주전체의 넋을 말하며, 개별적인 의식이 아닌,

우주전체에 골고루 편재된 보편적인 의식을 우주의 넋이라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우주에 골고루 편재된 보편의식이란 바로 순수존재의식을 말하며,

이현상세계의 온갖 다양한 형태와 색갈과 개별적 특성들은 이 우주적 보편의식에서 분화되어 나타난 것이고, 그 속에서 유지하다가, 그속으로 다시 사라지는 것이죠.

우주적 보편의식이란 삼라만상이 그속에서 생주이멸하는 마치 허공과 같은 의식의 그릇이라고 묘사할 수가 있겠읍니다.

이것은 의식의 근본(뿌리)이면서, 기본의식이기도 하고, 이 의식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탄생하며, 그 시간과 공간으로 인해 세상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죠. 

 

이러한 전체 보편의식을 자아적 측면으로 우주적 자아 또는 보편적 자아라고도 합니다.

인도 베단타에서는 이것을 아트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載營魄이란 바로 우주적 보편의식에 잠겨있는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직역해 보면,

영백에 실려서 하나로 품는다-이렇게 직역하게 되고,

다시 영백을 우주적 보편의식으로 바꾸면,

보편적 의식이 되어 우주전체를 하나로 품는다.

能無離乎- 이 우주와 일체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글을 다듬으면,

[우주의식안에 잠기어 세상과 일체가 된 상태에서

거기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번역서를 들여다 보겠읍니다.

<땅의 정기를 싣고 하늘의 정기를 품고서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혼과 백을 하나로 끌어 않아, 분리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혼백을 잘 간수하고 순일한 정신을 지니어,

  여기로부터 떠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혼백을 타고 하나를 지키면서 일탈하지 않을 수 있는가?>

<육체적 정신적인 모든 활동 속에 하나를 품어서 능히 이를 떠남이 없읍니까?>

<온나라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여 그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땅의 형체를 한몸에 싣고 하늘의 하나를 껴안는다,

  그것이 떠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專氣致柔 能嬰兒乎?

專;오로지,제멋대로하다,전일하다(마음과 몸을 뫃아 오로지 한곳에만 쓰다) 

氣 ; 기운,숨,힘,자연현상.주의  

致 ; 이르다,다하다,이루다,부르다,보내다,그만두다, 주다,풍치.

柔 ; 부드럽다,연약하다,순하다,복종하다. 

嬰 ; 어린아이,갓난아이,두르다,잇다,안다,연약하다.

兒 ; 아기

 

專氣 : 氣(마음의 중심,주의)를 오롯하게 한곳에 뫃아서,

致柔 ; 마음의 움직임이 미약해져 그치게 하다.

 

이 문장은 앞의 문장인 "전우주와 일체가 된 상태"와 바로 연결된 내용입니다.

전 우주와 일체가 된 의식상태에서,

그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한곳에 고정함으로써,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도 없도록 고요한 상태에 있는 것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어떤 주석서(하상공본)는 기를 숨이라고 주석하여 숨쉬기를 어린아이처럼 유연하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양생론의 기본개념으로 받아 들이는 곳도 있읍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호흡의 기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 즉 주의력 또는 정신집중력이라는 의미로 보았읍니다.

 

해석을 해 보면,

[기운을 오롯하게 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여,

젓먹이 아이처럼  될수가 있겠는가?]

 

전체우주적 의식이 된 상태에서, 마음의 중심을 움직이지 말고,

한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의  움직임이 그치게 하면,

마음을 완전히 넘어서 있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흐른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 안에서 지각하는 대상이 있는 이원화상태라고 볼수 있읍니다.

 

그러나 우주적 보편의식은 마음 넘어에 있는 것이고,

비록 마음 넘어 보편의식에 있다고는 하지만,

만일 마음이 미세하게라도 움직인다면,보편의식 안에 안정되어 있지를 못하고, 마음 안팎으로 들락날락하는 불안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한곳에 가만히 정지하고 있음으로써, 마음의 움직임을 그치게 하고,

마음 넘어 의식에서 안정되는 것이죠.

 

이렇게 마음 넘어 의식에 안정되어 있으면, 마치 갓난아기 처럼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기자신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전체의식에 안주한 상태이죠.

여기서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간난아기의 의식이 왜 보편의식과 비슷한지를 설명을 좀 해야 되겠네요.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아기는 의식적으로 순수하다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의식이 없어서,"내가 있다"라는 자기존재를 모릅니다.

이상태는 완전히 무지상태인데, 그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보편적인 순수의식상태와 비슷합니다.

 

이 아기가 가지고 태어난 무지의 순수의식이 점점 자라면서 엄마의 무의식적인 교육이나 주위 환경조건에 의해서  앎이 깨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앎이 바로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는 것이며,

이앎이 점점 진화 발달되어 개체적인 에고를 만들죠.

이 앎이 깨어나서 발달된다는 의미는 의식이 자신을 주체와 객관대상으로 이원화로 분활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의식의 발달이란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순수한 존재의식에서 마치 세포가 분열하는 것처럼, 수많은 다양한 형태로 분열해 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그래서 이 앎이 발달 될수록, 지성이 점점 계발 되면서,전체와 자신을 분리하는 개체적 에고성이 더욱 강화된다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발달된 지성과 감성이라도 결국은 기본바탕의식은 아주 미세하게 순수한 존재의식으로써, 아무것도 모르고 고요하게 있는 갓난아기의 무지한 의식과 거의 같다는 것이죠.

 

점점 성장하면서 이 의식은 어른이 되어서는 독립적이고 전체와 분리된 개인에고로 단단하게 굳어져서,

이기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이 되어 가면서, 개체들 간의 생존경쟁 속에서,

세속적으로 성공하여 한나라를 다스리기도 하고,

거대 기업체를 운영하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범죄자도 되는 등,

모두가 그 기본은 어린아이 시절의 무지의식이 기본바탕이라고 할 수가 있죠.

아무리 뛰어난 천재 과학자나 예술가,세계를 주무르는 권력자, 또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라 할지라도 그 기본 의식은 어린아이시절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무지의식입니다.

장성해서도 그 간난아이 때 가지고 있던 무지의식을 의식바탕에 그대로 지니고 있읍니다.

 

바로 이 아무것도 모르는 간난아이 의식처럼 되어야, 어른으로써 가지고 있는 복잡하게 분화되어 발달한 분화의식이 조용해지면서 본래의 생긴대로의 순수의식에 접근되는 것이죠.

마치 어린아이처럼 자기자신조차 모르면서 고요하게 되어야,

비로소 보편의식에 안정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노자도인은 완전 전체의식을 간난아기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의식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단순히 순지무구한 상태를 비유한 것이 아니라, 자기존재조차도 알지 못하는 완전한 무지상태가 되었는지, 수행자 스스로 점검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전체성에 안주한 것이죠.

완전히 깨달은 성인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와 같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죠.

 

다른 번역서를 보겠읍니다.

<기운을 온전히 하고 부드럽게해서 갓난아이와 같이 될 수 있는가?>

<기운을 전심전력으로 뫃아서 부드러움을 이룬것이

  어린아이와 같을 수 있는가?>

<기를 오롯하게 하고 신체를 부드럽게하여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

<정기를 오로지 하여 유연한 마음을 이룩하여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

<기를 다스려 유함에 이르렀다 해도 능히 간난아이와 같은 상태입니까?>

<백성의 기운을 오로지 부드럽게 하여,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만들수가 있겠는가?>

<기를 집중시켜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기가 될 수 있는가?> 

 

위의 번역서들은 갓난아기의 부드러움에 대한 특성을 강조했지만,

실은 노자도인은 갓난아이의 고요한 무지의식을 묘사한 것입니다.

 

 

滌除玄覽 能無疵乎?

滌 ;씻다,닦다,청소하다. 

除 ;덜다,버리다,벼슬주다,다스리다, 섬돌(집앞뒤 문앞에 있는 돌계단)

玄 ;검다,오묘하다,하늘,

覽;보다,두루하다,바라보다,받다,받아들이다,경관

疵 ;허물,흠집,흉,흉보다.

 

滌除;마지막 상속되어 저장되어 온 훈습을 닦아서 ,

玄覽;내면바탕으로부터 주시하게되면

能無疵乎; 허물을 없을 수가 있는가?

 

위의 두가지 수행결과에 이어서 연결되는 점검사항입니다.

滌除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섬돌을 닦는다-라고 직역할 수 있지만,

여기서 除자는 집 현관문 앞의 신발 놓는 섬돌이라는 뜻이지만,

의식측면으로 해석하자면, 의식의 마지막 문턱인 존재의식(제8 아뢰아식)속에 상속되어 저장되어 있는 종자식인 훈습을 닦는다는 의미죠.

 

玄覽에서 玄은 의식 넘어 깊은 내면을 말하며,

覽은 (그 깊은 내면에서) 주시한다는 말이죠.

 

따라서 해석을 해 보면,

[마지막 습성(習性)마저 닦여지고 내면바탕으로부터 주시해서,

아무런 허물도 없게 할 수 있는가?]  

 

구도자가 순수의식에 접근하더라도 수천만년 동안 저장되어 오면서 상속된 훈습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읍니다.

여러가지 원습의 찌꺼끼들이 끼어 있어, 이들 습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의식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죠.

여기서 마지막 습성이란 바로 불교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8식인 아뢰아식에 저장된 훈습을 닦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현관 실내에 들어가기전에 섬돌에다 신발을 벗어 놓는 것처럼,

존재핵점으로 진입하여 나가 절대와 합일 되기 전에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하죠.

 

그러나 나라는 의식이 빠져버려야 할 존재발현핵점 구멍근방에 붙어있는 남은 훈습들 때문에, 의식을 절대본체에 합일하지 못하고 그 구멍 주변을 맴맴 도는 것과 같이 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죠.

이 습성마저 닦여지면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면서 머리는 본체에 들어가 있고,

두발은 존재핵점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절대본체이면서 보편적 의식속에서 남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죠.

이상태에서 자연주시상태로 존재의식의 안경을 통해서 현상세계의 주시하기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이러할 때 과연 의식과 마음에 작은 습이라도 남아 있느냐 점검해 보라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해서 위의 세문장은 구도자가 수행중에 자기의 수행상태를 점검하고 확인해 보는 사항이며, 동시에 구도 수행의 기본 이정표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다시 한번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1. 우주의식에 잠기면 세상과 일체가 되는데,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주의를 한곳으로 오롯하게 뫃으면, 마음의 움직임이 정지되는데,

    간난아이 처럼 고요한 무지상태로 있을 수가 있는가?

3. 의식의 마지막 남은 습기마저 깨끗이 닦아내면,

    깊은 내면의 본체로 부터 주시하게 되는데,

   어떤 습성의 허물도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수행자에게 자기점검을 하는 테스트 포인트라고 할 수가 있읍니다.

 

다른 번역서들을 보겠읍니다.

<마음을 씻고 닦아서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현묘한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서 터럭만한 흠도 없을 수 있는가?>

<마음의 거울을 닦고 닦아 티끌이 없게 할 수 있는가?>

<깨끗히 마음을 씻어내어 현묘한 관찰력을 지니므로써,

  잘못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음을 닦아 만물의 오묘함을 본다고 하더라도

  능히 한점의 티끌도 없는 상태입니까?>

<백성의 섬돌을 손수 닦아 주고 그 어두운 곳을 살펴,

  백성의 아픈 곳을 없이해 줄수 있겠는가?>

<가물한 거울을 깨끗히 씻어 티가 없이 할 수 있는가?> 

 

愛民治國  能無知乎? 

愛;즐기다,아끼다,그리워하다. 治;다스리다. 知;알다,앎,주관하다.주장하다.

 

이번 문장부터는 구도자가 수행이후에 일반사회의 삶 속에서

자기 수양상태를 점검하는 사항입니다.

실제로 대면된 상황이 아니라,

만일 구도자가 예를 든 어떤상황에 있을 때에는 점검해 보는 가정법

물음입니다.

 

위의 애민치국 능무지호,도 그대가 만일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을 되었을 때에 자기 주장없이 일할수 있는가?

하고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도인의 무위행이 계속 유지하겠느냐,는 물음이죠.

 

참고적으로 백서본에서는 좀 다르게 되어있읍니다.

백서본 - 愛民栝國 能母以知乎

왕필본 - 愛民治國 能無知乎

백서본의 괄자는 활이나 휜 나무를 바로 잡는 틀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뜻인것 같읍니다.

能母以知,는 "기교로 다스릴 수 있는가",라는 뜻이랍니다.

 

여기서는 왕필본 그대로 번역을 하되,

無知를 "앎이 없음"이나 "모름"으로 해석하지 않고,

知자는 "알다",이외에 "주장한다", "주관하다",는 의미도 있으므로

그런 뜻을 활용해서 그대로 번역하겠읍니다.

실제로 知자를 형상문자로 破字해 보면, 활矢자와입口자가 합성된 글자로

화살이 빨리 나가는 것처럼 말을 잘한다,는 의미에서 말을 빨리 잘하니깐 많이 안다고 해서 "안다"라는 뜻으로 주로 쓰지만,

이글자에는 오히려 자기 주장의 말을 빨리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내재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주장한다, 주관한다"라는 뜻도 틀리지는 않죠.

그래서 이 노자 도덕경에서 "無知"란 바로 "모른다"는 뜻도 있지만,

오히려 "자기 주장을 안한다"라는 의미로서 더 많이 쓰여지는 것 같읍니다.

 

해석해 보면,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에 있게 된다면,

자기주장을 내세움 없이 일할 수가 있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관리나 정치지도자가 되더라도 자기 주장을 내세워 무위적인 행으로부터 떠나지 말것을 일예를 들어 주의를 준 것이죠.

제3장에서 성인은 자기 마음만 텅 비우면 저절로 백성들도 마음을 비우게 되고,

백성들이 마음을 비우면 농사일에 열심히 하여 나라가 풍족해 지며,

성인이 무엇인가 큰일을 저지르려는 욕망을 자제하면,

백성들이 안심하고 평화롭게 살수 있으니깐,

나라전체가 기강이 확립되고, 국력이 튼튼해진다,고 설명되어 있읍니다.

성인은 그저 말없이 있는 그대로 마음을 텅 비우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다른 번역서를 보겠읍니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억지로 일삼은 지식을 사용치 않을 수 있는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면서 무위자연의 상태일 수 있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되 무지하게 만들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지에 의존치 않고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앎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天門開闔  能無雌乎? 

開;열다,피다,펴다,개척하다,깨우치다. 闔;문짝,하늘문,뜸,온통,전부의,닫다.

雌; 암컷,쇠약하다,약해지다.패배하다,지다.

 

天門; 두눈의 미간에 있는 靈眼, 제3의 눈, 지혜의 눈, 보통 인도 요가에서 아즈나 차크라,라고 하는 곳인데,

수행 중에 또는 완전히 깨닫고 나서 이 영안이 열리면 신통력이 나타나서, 영적인 측면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미래를 예견하기도 하며, 천기를 알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초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공이나 단학같은 호흡위주 수행체계에서는 이천문을 콧구멍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숨(천기)가 들락날락 하는 문이 콧구멍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는 초능력이 열리는 미간에 있는 제3의눈인 지혜의 눈을 가리킵니다.

 

天門開闔; 신통력이 열리기도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能無雌乎; (그러한 신통력에이끌려서) 약해지지 않을 수 있는가?

여기서 雌자는 암컷雌자이지만, 원래는 암컷새를 의미하며,

암수가 교합하기 전에는 숫컷이 암컷을 잡을려고 따라다니지만,

일단 숫컷에 암컷이 한번 정복 당하고 나면, 숫컷을 졸졸 따라 다니면서

약해졌다,의존하다,라는 의미로 "약하다" 또는 "이끌려 다닌다"라는 뜻이 있읍니다.

여기서는 靈眼이 열려서 초능력이 생기면, 그 능력에 이끌려서 의지가 나약해진다는 의미죠.

비슷한 단어로 "雌雄을 겨룬다",할때에 암컷과 숫컷을 가린다,라는 뜻이 아니라,

"누가 더 강하고, 약한지"를 겨룬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해석해 보면,

[영안이 열려서 신통력이 나타나도

그것에 이끌려 약해지지 않을수 있는가?]

 

 어떤 주석서는 能無雌乎라는 의미가 앞에 天門 開闔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能爲雌乎로 고쳐서 주석하는 데도 있읍니다. 이경우는 "암컷처럼 순하게 할수 있는가"라고 번역이되겠죠.

 

구도자 또는 도를 완성한 후에도 그 무위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초능력이나 신비현상에 이끌려서, 그것을 활용하여 사회적 명예나 권위,또는 재력을 쌓는데 활용하게 되면, 그의 도력은 점점 상실되는 것이죠.

점점 그러한 도력이 상실되니깐, 나중에는 처음에 얻어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부풀리는 선전을 하게 되고, 상실된 능력을 감추기 위하여

조직력을 강화하여 제자들에게 무조건 신앙을 강조하거나 허위 선전을 일삼게 되므로써,

처음에 약간의 도에 진입하던 상태마저 완전히 상실되어 보통사람보다도 더 악에 물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의 9장에서도 경고한 것처럼, 이10장에서도 자기점검사항에 반복 설명하고 있읍니다.

 

다른 번역서들을 보겠읍니다.

<열리고 닫히는 하늘문과 같은 암컷이 될 수 있는가?>

<보고 듣고 말하고 침묵하는 등 감각기관이, 활동하면서 여성적인 허정을 지킬수 있는가?>

<숨을 들이 쉬고 내쉼에 있어, 암컷처럼 고요히 할 수가 있는가?>

<하늘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자연이 변화함에 따라 암놈처럼 수동적이어야 한다>

<천문의 여닫음이 된다고 하더라도, 능히 여인처럼 저절로 작동되는 수동적인 상태입니까?>

<성인의 도를 행하는 데 있어, 배필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늘문이 열리고 닫힘에 암컷으로 머물수 있는가?>

이부분은 번역이 아주 다양다색하군요. 

 

明白四達 能無爲乎?

明;밝다,똑똑하다. 達;통달하다,달하다,이루다,통하다,능숙하다.

 

明白; 뚜렷하고 환함,

四達; 모든 것에 통달함.

 

도를 닦아서 순수존재의식에 가까히 되면,

모든 수행이나 개념적 이론이 저절로 훤하게 잘 알게 됩니다.

전혀 보지 않은 어려운 개념도 잠깐 대하면 잘 이해가 되는데,

마음이 깨끗해지고, 의식의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앎에 대한 장애물이 없어져서 무엇이든지 원하면 잘 알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이런 앎은 더 진행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상태 비슷한 컴컴한턴널을 지나게 되지요.

그 턴널을 완전히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그 경계를 넘어서야 앎으로부터 벗어나서, 더 넓은 곳으로 가서 광명을 보는 것이죠.

이렇게 모든 것을 잘 알게 될 때에 스스로 지성을 사용하지 말아야 되는데, 오히려 더 사용함으로써, 더 깊은 내면 속으로 진입히지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잘 아시는 노자도인이 여러방면으로 많이 안다고 그 앎을 활용하지 말라는 말씀같읍니다.

 

해석해 보면,

[뚜렷하고 밝은 앎이 사방으로 두루 통달하지만

억지로 일삼지 않고 무위로써 지낼 수가 있는가?]

 

도가 완성되면 모든 것을 환하게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일은 그일 나름대로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나라는 에고가 사라졌기 때문에 억지로 일을 만들지 않죠.

그러나 절대본체에 완전히 정착이 안된 경우에는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유위적인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읍니다.

자기가 나서야 된다,는 행위자의식으로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도인의 자세라고 말할 수가 없죠.

 

도를 닦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사회정의감에 따른 사회활동을 한다거나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변혁해야 한다는 개혁가 기질이 있는 분들도 많죠.

이런 분들이 도를 완성한 분들이라면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상황에 맞추어져서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죠.

어떤 행위가 옳다,그르다 판단 할 수는 없지만,

노자도인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도인은 항상 무위적으로 없는 것처럼

말없이 행하라는 것을 강조하셨읍니다.

 

참고로 왕필본의 能無爲乎,는 백서본에서는 能母以知乎,로 되어 있읍니다.

"아는 척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문장에서는 오히려 백서본의 문장이 좀 적절하게 맞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왕필본에 있는대로 해석하겠읍니다. 

 

다른 번역을 보겠읍니다.

<사방을 두루 밝히고 미치지만 억지로 일삼지 않을 수 잇는가?>

<사방통달한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지인채로 있을 수 있는가?>

<사방에 두루 통달하여도 아는체 하지 않을 수 잇는가?>

<분명하고 밝게 뜻을 온 천하에 전하면서도 꾸밈이 없이 할 수 있겠는가?>

<명백히 깨달아 사방에 통달함에 함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生之  畜之 

生;나다,낳다,살다,기르다. 畜;짐승,쌓다.기르다,붙들다,일어나다,따르다.

 

이문장부터 아래문장들은 주어와 술어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죠.

주어는 맨 마지막에 是謂玄德이라 알려 주었으니, 현덕이라고 볼 수가 있겠읍니다.

玄德은 도의 본체에서 바로 나온 순수의식을 말합니다.

道의 작용을 여기 노자 도덕경에서는 德이라고 하는데,

이장에서는 현덕이라고 했읍니다.

玄이란 검을 玄자 이지만, 검고 신묘하며 그윽하다, 몇가지 이미지가 있죠.

의식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마치 검은 어둠처럼 " 내면의 모름"과 같은 것이죠.

도의 본체에서 바로 나온 순수존재의식은 육체기관에 의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의식 내면에 있는 의식의 순수상태를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으로써 어떤 나타남도 없이 그자체가 空 입니다.

이것이 우주적 보편의식이죠.

이 순수존재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육체와 마음이 나타나며, 온갖 사물과 생명체가 나타납니다.

마치 태양에서 바로 비쳐오는 햇빛이 지구상의 온갖 모양과 색갈로 나타나고, 온갖 생물체를 생장시켜 주듯이,

도의 본체에서 비쳐지는 존재의식은 육체기관에 반사되어 온갖 현상을 일어나게 하고, 기르는 것이죠.

 

[의식은 온갖 만물을 낳고, 기르는데,]

 

生而不有

有;있다,가지다.

[만물을 낳으면서도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현상계는 의식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원래 순수의식은 마치 순수해서 보이지 않는 태양빛과 같은데, 나타난 다양해 보이는 만물이란  마치 태양빛이 프리즘에 의해 여러 파장의 무지개색으로 분해 되어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어떤 색채라도 그것은 빛의 일부분이 분해된 것과 같이, 모든 만물은 의식에 의해 변조되어 나타나 현상으로써 보여지는 것이죠.

그렇게 모든 만물이 의식에서 나타나지만, 존재의식자체는 그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읍니다.

 

爲而不恃

爲;하다,행하다,위하다,되다.생각하다,배우다,가장하다.

恃;믿다,의뢰하다,어미.

[만물을 보살피면서도 그베품의 결과를 기대하지 않으며]

 의식은 만물이 생장하도록 보살펴 주면서도 그행위에 전혀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長而不宰 

長;길다,낫다,나아가다,자라다.맏,우두머리,어른,늘,항상

宰;재상,우두머리,무덤,주관하다.

[만물의 어른이면서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의식은 만물이 나온 근원인데도 만물에 대하여 조금도 참견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부분은 어떤 번역서는 "만물을 자라게 하면서도 좌지우지 않는다"라고 한 책도 있는데, 자라게 보살펴 준다는 항목은 위의 위이불시,에서 설명했읍니다.

따라서 이구절은 장자가 어른,맏,으뜸,의 의미로 쓰여져야죠.

 

是謂玄德.

是謂 : 이것이 바로 ~라고 한다.

德;큰,덕,도덕,정의,은혜.은덕,복,

 

[이것을 현덕(보편의식)이라고 한다.]

 

이 현덕이란 도의 순수작용이라는 의미이며,

도의 본체에서 최초로 직접 나타난 순수존재의식을 말하며,

우주적 자아(아트만) 또는 보편적 의식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모든 만물의 근원이며, 일원적인 특성이 있읍니다.

일반 세속에 나와 사는 도인들은 바로 이 현덕인 존재의식을 가지고

무위적인 행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이 마지막줄의 생지 축지 부터 ~ 시위현덕,까지의 문장들이 위의 6개 문장과 전혀 내용적인 면에서 별개라고 해서 어떤 주석서들은 이부분이 잘못 삽입된 문장들이라고 판단하는 곳도 있읍니다만,

전체 문장구조를 잘 검토해 보면, 이 아래 문장들은 구도자에게 현덕의 무위적인 특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의미로 결어로써 쓰여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위의 문장 전체에 대해 다른 번역서 내용을 보겠읍니다.

<도는 만물을 낳고 기르지만 그공을 소유하지 않고, 기대지 않으며,생장시키지만 좌지우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덕스러움이라고 한다>

<낳아주고,길러주네,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길러도 주재하지마라, 이것이 가물한 덕이라 하네>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없는 듯이 살며, 꾸밈에 의존하지 않고, 우두머리이면서 다스리지 않으며,

이를 일컬어 현덕이라 한다>

<도는 창조하고 덕은 축적하네, 낳은 것은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것을 내뜻대로 만들지 않으며, 자라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가물한 덕이라 하네>

<만물을 생성케하며 만물을 생육케 하여야 한다, 생성시키고도 그것을 차지하지 않으며,

행동을 하더라도 의지하는 데가 없어야 하며, 생장토록 해주면서도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이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글이 너무 장문이 되었읍니다.

이번 10장은 나름대로 구도자들에게는 유익한 정보가 될 것 같읍니다.

수행자가 자기점검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준이 애매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점검항목이지만, 순수의식상태에서는 아주 유용한 지침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제 10장을 끝내면서 앞으로도 이 짓을 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 중입니다. 이도덕경을 번역하려면 어느정도 무식해야 제대로 번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읍니다. 너무 박식하고 아는 것이 많으면 간단한 한글자 한문이라도 온갖 상상력이 동원되어 덧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해지죠.

머리에 많은 지식이 있을 수록 도덕경의 본래내용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읍니다.

통상 일반사회에서 인정하는 박학다식하고 논리정연하고 똑똑하다는 지성의 소유자는 사실 도인 세계에서는 가장 낮은 레벨 축에도 낄 자격조차 없으며,

대체로 어차피 버려야 되는 쓰레기 비닐봉투 정도로 밖에는 취급을 안합니다.

 

많은 번역서를 보면서 도덕경을 제대로 읽을려면 머리가 아주 단순해져야

된다는 것을 느꼈읍니다.

그동안 별로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지만,

아무 말없이 진지하게 읽어주신 네티즌 여러분께 깊히 감사드리면서,

지루하게 긴글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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