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 7장, "나 없음"은 영원하다~~~

예암 노마드 2014. 2. 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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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 7장, "나 없음"은 영원하다. 

[原文]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  장 지  구    천 지 소 이  능 장 차 구  자    이 기 부 자 생     고 능 장 생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시 이 성 인  후 기 신 이 신 선     외 기  신 이 신 존

 

非以其無私耶

 비 이 기 무 사 야

 

故能成其私

 고 능 성 기 사

 

 

[解釋]

 

하늘은 늘 그러하고, 땅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소. 

이처럼 천지가 늘 변함이 없이 오래가는 까닭은

"나"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항상 변함없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외다.

 

그러므로 성인이,

그자신을 가장 뒤편의 내면속으로 물러나 있게 하는 것은

가장 먼저있는 원초근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그자신을 외부적인 객관대상으로 지켜 보는 것은

내면적인 주시자로서 존재하는 것이오. 

이는 곧  사사로움(개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

 

그러므로 이렇게 하면,

개인적인 나를 능히 끝낼수가 있는 것이외다. 

(그리하여  無我로써 無爲的인 삶을 사는 것이외다) 

 

 

[解 說]

 

이번 7장의 핵심 내용은 "나 없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첫구절은 천지가 오랫동안 존재하는 까닭이 "나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오래 유지한다고 예를 들어 설명했읍니다.

다음구절은,

"나라는 생각"에서 떠나기 위해서 자기자신을 지켜 보는 데,

이 지켜 봄으로 인해서 자신이 뒤편으로 점점 물러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이 뒤쪽 내면으로 점점 더 물러 난다는 것은

가장 이전부터 있었던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죠.

이 의식의 뿌리가 자신의 가장 원초적인 의식입니다.

 

자신의 몸과 의식을 객관적 관찰대상으로 여기면

자신은 몸과 마음이 아니죠.

왜냐하면 앞에 보이는 대상이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육체적 나라고 한다면,

보는자는 보이는 대상이 아니니깐,

보는 자는 내면에 있읍니다.

보는 자인 자신은 절대로 볼수있는 대상이 아니며,

보여지고 알수있는 몸과 마음은 나자신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다면 보는 자인 내면의 나는 그렇게 존재하지만,

마음으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이런 방법으로 내면의 나를 찾아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참고해서 이 중간 구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육체와 의식의 동일시로 부터 벗어남으로써 사사로운 나,

즉 에고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원문에는 없지만, 육체의 동일시 된 개아의식이 사라져서 "나라는 생각"이 없고,

의식적인 나도 사라지게 되면,

(無我(나없음)으로써 무위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해석 말미에 부가해서 써 놓았읍니다.

 

이제 해석해 보겠읍니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天長地久

長 ; 길다, 나아가다,첫,어른,항상,늘,  久 ; 오래다,오래머무르다,가리다.

직역을 해 보면,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간다.-

이렇게 직역이 됩니다만, 長자는 항상, 늘,이라는 뜻도 있읍니다.

그래서 좀 번역을 다듬으면,

<하늘은 늘 그러하고, 땅은 오래도록 변함이 없다>

이렇게 번역을 했읍니다.

 

어떤 주석서는 天은 시간을, 地는 공간을 의미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저는 반대로 天은 공간을, 地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읍니다.

왜냐하면 天은 공간으로써 변하지 않고, 허공 그자체이며,

地는 시간에 따라 변하므로 시간을 표현한다고 보고 있읍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天이 長하다는 공간적 표현을 쓰고,

地는 久하다는 시간적 표현을 쓴 것 같읍니다.

 

그러나 위 본문에서는

천지를 시간과 공간을 분리해서 어떤 메세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무한성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언급도 없고

단순히 오랜시간동안 변함없이 있다는사실에 대해서만 설명하려는 것이어서,

여기서는 그저 일반상식적인 측면으로 통상 말하는 하늘과 땅으로 번역을 했읍니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所以; 까닭, 能 ; 능하다, 능히 할 수 있다. 且 ; 또, 또한

직역해 보면,

-천지가 능히 늘 그러하고 또한 변함없이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좀 말을 다듬으면

<천지가 항상 변함없이 오래가는 까닭은>

 이렇게 문장을 가다듬었읍니다.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以 ; 써, 부터,까닭, 닮다. 自 ; 스스로,자기,몸소, 故 ; 연고,까닭 ,연유,그러므로

能 ; 할수있다,

-그것은 자기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사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不自生- 인데,

-스스로(몸소) 생기지 않았다-라고도 번역이 되죠.

스스로 생기지 않았다는 뜻은 "나라는 의지적인 정체성"이 없고,

아무런 주체성 없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의미죠.

결국 이말은 "나라는 의식"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장을 가다듬어 보면,

< 그것은 "나"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래 살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위의 전체 문장을 묶어서 연결해 봅니다.

<하늘은 항상 그러하고, 땅은 오랫동안 변함이 없다.

  천지가 항상 변함없이 오래가는 까닭은

  "나라는 생각"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변함없이 오래가는 것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다른 말로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죠.

어떤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주인도 없고 원인도 없고, 저절로 있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종교의 조물주 신은 하늘과 땅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있으나,

이는 사람이 만든 개념과 상상일 뿐이죠.

 

그러나 전체의식적인 측면에서 하늘과 땅은 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것임에는 틀림없읍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 이 도덕경 본문내용과는 연관이 안되기 때문에 다음기회로 으로 미루겠읍니다.

 

그러면 다른 번역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하늘과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간다>

<천지는 너르고 오래가네, 천지가 너르고 오래 갈수 있는 까닭은 나만 살겠다 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길이 존재하네>

<하늘은 영원하고 땅도 영존한다.하늘과 땅이 영원하고 영존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 스스로

 생존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영원히 생존하게 되는 것이다.>

<천지는 영원하다.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이니,

  이때문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수 있는 것이다>

< 하늘과 땅은 길고 오래간다. 하늘과 땅이 그토록 길게, 또 오래도록 가는 이유는

   존재하려고 스스로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은 영원합니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만물을 낳는 것은 내가 낳는다는 생각이 없이 낳기에

  영원히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是以聖人 後其身 而身先   外其身 而身存

 

是 ; 이것,이에, 무릇, 後 ; 뒤, 뒤로 미루다. 身 ; 몸, 몸소, 而 ; 말잇다,같다, 너, 뿐, 先 ; 먼저,옛,앞서다.  外 ; 바깥,멀리하다. 存 ; 있다,묻다,살아있다,보존하다,살피다.

是以聖人 : 이와같이 성인은-

 

後其身而身先

글자 그대로 직역하면, -몸을 뒤로 물러나게 함은 몸이 앞서는 것이다.- 입니다만,

여기서 身이란 자신(自身)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체적인 나를 身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여기 본문에서는 육체를 벗어난 내면적인 참나도 모두 身(몸)이라는 글자 하나로 공통으로 썻읍니다.

그래서 모든 번역자들이 정말 헷갈리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後其身-자신이 뒤로 물러난다>라는 뜻이죠.

而身先- <자신이 가장 의식이전 내면의 근원 바탕에 있다>

쉽게 다시 말하면,

<자신이 뒤쪽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내면적으로는 가장 앞서서 이전에 있는 원초근원에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일단 자신이 원초근원이 되면 앞서 있었던 모든 경계,세상,육체,마음등, 모든 이원성이 사라지고

"그것"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식의 이원적인 상태에서나 전과 후, 안과 밖이 구분 될뿐이고, 일단 내면의 근원이 된다면

모든 것은 환상 같다는 것을 깨닫읍니다.

그렇게 일원적인 본래의 순수한 자신만이 앞으로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뒤로 물러나는 방법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은 다음구절에 나오지만,

미리 말하자면 자신을 지켜 보는 것이죠.

보통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몸과 동일시해서 자신을 몸이라고 여기죠.

몸과 마음은 같이 딸려 있는 것이지만, 자신이 몸을 지켜 본다면 자신이 몸이 아니죠.

또 자신이 경계없는 순수의식이 되어 그 순수의식을 지켜 본다면,

자신은 순수의식이 아니고, 그 의식이 나오기 이전의 어떤 것이죠.

그렇게 지켜 볼 수 있으면 자신은 뒤로 밀려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육체라는 동일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개인적인 자아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켜 보기 때문에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질 못합니다.

제대로 내면 깊히 들어가려면, 자신의 육체 동일성을 벗어나서,

자연 주시상태가 되어야 의식의 근원까지 깊히 들어 갈 수가 있읍니다.

 

앞서 而身先-구절에서 이先이라는 글자가 어떤 움직이는 것에서 가장 앞선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는 가장 먼저 나온 원초적인 바탕을 말합니다.

그래서 외면에서 보자면 가장 뒤쪽에 숨어있는 근원을 말하죠.

반면에  앞에 구절의 後其身의 後는 외부적으로 보면 마지막 뒤쪽(내면 안쪽)이지만

내면쪽에서 보면 맨처음 나온 맨앞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後其身 而身先-에서 앞의 -後其身-은 외면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뒤의 구절 -而身先-은 내면쪽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표현구조를 파악을 할 수 없으면 요상스런 문장으로 번역이 되는 것이죠.

 

만일 이구절을 -몸을 뒤로 물러나지만 오히려 앞서게 된다-

하는 번역은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외부 현상계내에서의 물러남만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의미가 되죠.

그리고 마치 노자가 다소 야비한 처세술을 가르쳐 주는 듯하게 느껴지죠.

자신이 앞서기 위하여 작전상 자신을 뒤로 후퇴시킨다-라고 노자가 가르쳐 주었을 리는

만무한데, 모두들 그런 얄팍한 처세술로 번역이 된 것 같읍니다.

 

 

外其身 而身存

글자 그대로 직역을 해보면,

-그것이 자신을 밖으로 있게하는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역할 수 있겠읍니다만,

다시 의미를 가다듬어서 번역해 보면,

<그 자신을 외부적인 객관대상으로 두면(지켜보면), 자신은 내면에서 (주시자로써)존재한다> 

 

外其身-<자신을 외부에 둔다.>는 뜻은 -자신을 밖에 있는 대상으로써 주시한다-는 의미죠. 

而身存-<자신이 지켜보며 존재한다>는 뜻은- 자신은 안에서 보는자로써 존재한다-

여기서 <存>자는 "있다" "존재한다"는 뜻도 있지만, 중요한 것이 "살피다"의 뜻도 있읍니다.

즉, <存>자는 "있음"이면서 동시에 "봄"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읍니다.

"存在"라는 단어자체가 "있음"과 "본다"가 동시에 포함된 것이죠. 

이것은 마치 거울이 "있다"이면서 동시에 "비춘다"가 있듯이,

마치 태양이 있으면 ,동시에 빛이 비추는 것과 같읍니다.

위의 -而身存-도 "자신이 있음"과 지켜본다는 주시자가 동시에 있기 때문에 번역에 풀어서 그대로 집어 넣었더니,  앞뒤 문장이 논리적으로  뜻이 통하는 군요.

 

여기서 일단 내면의 주시자가 되자마자, 앞의 대상과 주시자자체가 함께 사라져서 오직 하나로써

존재하는 것이죠. 외부와 내부, 대상과 주시자라는 구분은 어디까지나 마음 수준에서의 말이고,

일단 주시자로 안정되면 모든 경계와 대상과 내외와 주시자자체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때가 오로지 본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중간 구절을 전체 연결해서 번역해 보겠읍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그자신을 가장 뒤편의 내면속으로 물러나 있게 하는 것은

자신이 가장 앞서 있는 원초근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그자신을 외부적인 객관대상으로 지켜 보는 것은

자신이 내면적인 주시자로서 존재하는 것이오.> 

 

 

이 6장은 앞에 5장에서 도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구조적 개념을 설명해 준 뒤에

노자도인이 제자에게 직접 수행의 기본 개념을 가르쳐 주는 것 같읍니다.

道를 추구하는 수행자가 제일 먼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은 바로 자기자신이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육체와의 동일시란 자신을 작은 육체 몸으로 여긴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자기가 육체라는 개체로 여기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감각기관이 준 정보대로 갈갈이 분리된

경계로서 세상을 보는 것이죠.

자신을 개체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도 분리된 개체로 보며,

이러한 분리감이 전체성에서 유리되어, 자신은 태어난 육체이고, 앞으로 죽을 것이라고 여기며,

따라서 죽음의 공포가 자기 개체 존재에 대한 방어적인 안전과 공격적인 존재감 확보, 그로인한 투쟁과 갈등, 존재와 쾌락에 대한 집착,희로애락, 여러가지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인생극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깨달음이나 자기의 진정한 참나를 되 찾는 것은 바로 이 육체를 자기라고 동일시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째서 지금 육체의 동일시상태에 있는가, 라는 것을 확실히 이해만 해도 수행을 반이상 진척된 것이라 보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에고라는 것이 바로 육체와 동일시 된 개체적인 나를 말합니다.

육체동일시에서 풀려지면, 모든 것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 나 또는 의식 하나로만 느껴집니다.

여기에서 노자 도인이 말씀하신  뒷편으로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바로 "지켜 봄"의 주시자가 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읍니다.

가장 먼저 있는 원초근원에 있다는 것은 가장 뒤에 있는 주시자인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바로 이렇게 서서히 자기 내면바탕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행위나 생각의 주인공"이 아니고, 행위나 생각이란 의식에 의해서 저절로 진행되는 것이며,

나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아니다"하는 것이 바로 "나를 뒤로 물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수동적으로 "나"가 뒤로 물러서는 수행을 하면,

점차로 "육체 동일시의 개인적인 나"는 밖으로 사라져 버려서,

결국 남는 것은 "경계없는 보편적 의식"인 <순수空>만 남는 다는 것이죠.

여기서 육체동일시는 뒤로 후퇴했지만, 기본의식으로써의 "나라는 생각"의 뿌리는 의식으로서 남아 있읍니다. 

 

그래서 노자도인은 " 나라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두단계를 말씀하신 겁니다.

첫째는 수동적인 자세로서 자신을 내면 속으로 물러나게 하며,

둘째는 모든 자신이라고 여기는 몸,마음,감각대상(세상),의식을 외부 객관대상으로써

주시하면, 자신은 내면속의 주시자로서 저절로 안주하는 것이죠.

다만, 본문에서는 언급이 없지만, 자신의 육체동일시는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오로지 내면의 주시자에 연결이 닿을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다른 해석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에 있게 하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내버려 두지만 (오히려) 그 몸이 보존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기자신을 뒤로 돌리기에 남보다 앞서는 것이며,

  그 자신을 잊고 남을 위하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니,>

<이때문에 성인은 자신은 뒤로 물러나 오히려 앞서게 되고,

  자신을 방치하나 오히려 보존하네>

<그래서 성인도 자신을 뒤로 미루지만, 자신을 앞서게 되고,

  그 자신을 도외시 하지만 자신이 생존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기에 몸이 앞서고,

  그 몸을 밖으로 던지기에 몸이 안으로 보존된다>

< 그래서 성인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것으로 남의 앞에 서는 것을 삼는다.

   세상 밖에 자신을 둠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 이처럼 성인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신을 버리기에 자신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번역내용들을 보니, 외면과 내면의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한 번역이 없네요.

 

非以其無私耶 ?

非; 아니다, 그르다. 以 ;써,-부터,닮다. 같다. 私 ;사사,가족,집안, 홀로 , 耶 ; 어조사,그런가

직역을 하면- 이것이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즉, 위의 육체와 의식 동일시 된 자신을 밖으로 버리는 것이 바로 "개인성의 나가 없음"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형 강조로 되확인 한 것이죠.

말을 좀 다듬으면,

<이는 사사로운 나(에고)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읍니까?>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이것이 무아(無我)와 같다는 것 아닌가?>

또 다르게 바꾸어 보면,

< 이것이 "나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닌가?>

여기서 무사(無私),즉 사사로움이 없음은 불교의 無我(나 없음)와 같은 의미입니다.

글 구조는 아주 단순하지만, 그속에 숨은 뜻은 아주 거대해서 모양도 없고 크기도 없이 무한합니다.

 

여기서 다른 번역서들의 내용을 보겠읍니다.

<이것은 '나'를 주장함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이는 바로 사심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던가?>

<그것은 사아(私我)가 없기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그런것 아닌가?>

<이것은 작은 사사로움을 버리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故能成其私

故; 연고,까닭,이유,그러므로, 能 ; 능하다, 능히 할 수 있다,견디다.

成; 이루다,고루다,가지런히 하다,다스리다.완성하다,살찌우다.끝내다.

직역을 해 보면,

-그러므로 그것은 사사로움을 능히 끝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其(그것은)은 위의 두문장인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을 말합니다.

成자는 완성된다, 또는 이룩한다,는 뜻이 있읍니다만,

끝내준다, 다스리다,고루다, 라는 뜻도 있죠.

그런데, 해석상으로 개인성을 이룩한다, 또는 사사로움을 이룬다,라고 해석을 한다면,

전혀 그 위의 글내용과는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읍니다.

따라서 사사로움(개인성)을 다스린다, 또는 개인성을 끝낸다,라는 의미로 해석을 해야 되겠죠.

문장을 가다듬어서 만들면,

< 그러므로 이렇게 하면 개인적인 나를 능히 다스릴(끝낼) 수가 있다.>

즉 육체동일시 된 이기적이며 개인적인 자아(나)를 능히 다스려서 에고성을 끝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고성인 나가 끝난다,라는 말은 바로 자신이 보편적인 자아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 번역에는 보는 분들의 이해가 쉽도록

(무아로서 무위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해설을 덧붙혔읍니다.

 

다른 번역서들을 보겠읍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기에 '나'를 이룰수 있네>

<그렇게 때문에 성인은 사사로움을 벗어나 영원함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아도 완성될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룬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그러나 그럼으로써 능히 (자신의 보존이라는 큰)사사로움을 얻느니라>

<그러므로(이처럼 나가 없어졌기에) 자신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7장은 도덕경 중에서 비교적 번역하기 쉬운 문장인 갓 같이 보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니, 위의 다른 번역서 내용들을 보아서 알수 있듯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도 번역이 될 수도 있읍니다.

특히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의 구절은 무척 번역하기가 까다로운 문장인 것 같읍니다.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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