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子道德經 1張-16張~

노자도덕경4장~~~

예암 노마드 2014. 2. 19. 17:51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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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4장  

[原 文]

 

道沖而用之 或不盈

도충이용지      혹불영

 

淵兮 似萬物之宗

연혜   사만물지종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湛兮 似或存

담혜    사혹존

 

吾不知誰之子 

오불지수지자

 

象帝之先

상제지선

 

 

[해 석]

 

도는 텅 비었는데 그 작용함은,

기묘하게도 밑빠진 독에 물붇기 처럼 한계가 없네.

깊고 깊구나, 마치 만물이 나온 근원인 듯 하구나.

 

온갖 경계를 분별하는 자아의식의 날카로움을 꺽어서 누그려 뜨리면,

모든 인연과 경계에 얽혀있던 속박(업)으로부터 풀려나네.

 

순수의식의 빛이 도의 본체에 합일되면,

아주 미세해져서 보이지 않는 티끌과 같아지네.(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네)

 

삼매 속에 푹 잠겨 있으니,

기묘하게도 마치 있는 것 같기도 하네.(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네.

 

신이 나오기 그이전에도,

나는 있었네.

 

[해 설]

본 4장은 왕필본에서는 4장, 백서본에서는 48장, 곽점본에는 없는 장입니다. 백서갑본은 글자가 몇개 파괴되어 있지만 백서갑본과 을본을 보완해서 보면 왕필본과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본 해석은 왕필본의 원문을 기준으로 해석을 했읍니다.

이 장은 노자도인이 도의 삼매과정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혼잣말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그의미를 한글자씩으로 축약하여 숨겨 놓아서 보통 정신수행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전혀 정확한 핵심을 알아차릴 수가 없을 것 같읍니다.

학문이 높아서 문자해석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정신수행에서 높은 단계의 삼매체험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고서는 이 4장의 몇자 되지도 않는 구절을 이해하고 해석하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닐 것 같읍니다.

 

이제부터  노자도인의 삼매체험 속으로 함께들 들어가 보겠읍니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沖; 비다,온화하다,깊다. 而 ; 어조사.  用; 쓰다,작용하다,이용하다,

或 ; 혹시, 괴이쩍어하다. 존재하다.  盈; 차다,가득차다, 충만하다.

 

道沖而用之 : 도는 텅비었는데 그작용함에 있었서는,

或不盈 ; 괴이쩍게도 가득차질 않는다.

이 두문장을 붙여보면,

-도는 텅비었는데도 기묘하게 가득 차질 않는다.-

직역을 하면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道의 본체는 아무것도 없는 텅빈 空이라고 하죠.

사실은 텅 비인 허공이라고 해도 맞는 말은 아니죠.

왜냐하면 허공이라고 말하는 순간 개념적인 대상화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도의 본체에 대해서는 대상화되는 개념적인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일단 대화소통을 위해서 텅빈 허공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도의 본체는 텅빈 허공이라기 보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오며, 이원적인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지만, 그 언어이전의 도의 본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텅빈 허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에서도 최종 니르바나를 허공과 같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 도의 본체는 빈 허공과 같은데(道沖)

그작용은(而用之) 기묘하게(或) 가득차지 않는다(不盈)

여기서 不盈(가득차지 않는다)라는 말뜻은, 도의 본체를 무한한 빈그릇으로 가정하고는 그 무한한 그릇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넘쳐 흐르지 않을 정도로 무한량의 작용이 있다. 이거죠. 그렇지만 도의 본체는 항상 텅비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비었는데도 어디서 나오는지 무한정한 작용이 기묘하다고 "혹"을 앞에 쓴 것이죠. 우리나라 옛속담에 "밑빠진 독에 물붇기"라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로 두글자인 "不盈"으로 묘사한 것 같읍니다. 즉 그 작용이 무한량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좀 다듬었읍니다.

<도는 텅 비었는데, 그 작용함은 기묘하게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무한정하네>

즉, 도의 절대본체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것 같지만, 이 우주삼라만상의

현상세계의 모든 작용이 도의 본체에서 무한정하게 나타난다는 말씀이죠.

 

도를 묘사할때에 선불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성어가 있는데,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이 있읍니다. 즉, 도는 완전히 허공인데, 그허공에서

묘한 기운(有)가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삼라만상은 우주공간이라는 허공 속에서

생겨나와서 머물러 살다가 떠나서 사라집니다. 허공속에서 나왔다가 허공속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허공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읍니다.

 

우리가 보는 이 우주허공은 우리의 의식 안에서 나타난 것이죠.

그래서 끝을 알수 없는 우주허공조차도 우리내면의 의식허공안에 들어 있읍니다.

우리 의식안에 시간과 공간이 모두 들어 있죠.

그런데 우주보다도 더 크고 미세한 의식 허공은 절대 본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식은 미세한 파동성의 빛으로 물리적인 빛보다 수만배나 더 미세해서

그안에 시간과 우주공간,삼라만상을 다 집어 넣고도 남읍니다.

그런데 의식은 도의 절대본체에서 겨우 단 한줄기 의식빛이 투사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지요.

 

마치 온갖 세상의 다채로운 영상을 내보내는 테레비 방송프로그램이 한가닥 가느다란 전선에 의해 전기신호가 흘려서 온갖 세상의 영상들을 보여주는 것에 비유됩니다.

이세상의 근원은 우리의 존재의식이고, 이의식의 근원이 바로 절대 본체입니다.

그리고 도의 작용이라는 것이 바로 의식의 빛과 그의식안에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 우주삼라만상이죠.

이렇게 도의 본체는 텅 비었는데도, 도의 작용은 시간과 공간,그리고 온갖 삼라만상의

작용이 무한하다는 것을 위 본문에서 노자도인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도의 본체는 텅 비었지만, 도의 작용인 의식빛은 무한정의 다양한 변화작용을 합니다.

 

여기서 다른 번역서들을 몇가지 예를 들어 보겠읍니다.

"도는 텅 비어 있으면서 그 텅빔을 사용하는데, (부족하면 채워주되 )차서 넘치게 하지 않는구나."

" 도는 텅비어 있지만 거기에 작용을 가해도 절대로 차지 않는다"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도는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아서 아무리해도 채울 수가 없네"

도를 어떤 이원성의 객관적 대상으로 취급하여, 도를 사용한다느니, 쓴다느니,하는

능동적인 언행은 한마디로 道의 비이원적인 개념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죠.

 

淵兮 似萬物之宗

淵 ; 웅덩이,못,깊다.  兮 ; 어조사,

似 ; 닮다, 같다, 비슷하다. 萬物 ; 삼라만상, 宗 ; 마루 으뜸 근본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구나, 마치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노자도인께서 조용히 앉아서 삼매에 들어 갔읍니다.

삼매속에 푹 빠져서 그 깊이를 알수없는 내면 공간의 무한함을 감탄하면서,

바로 이세상이 나온 근원이 아닌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십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깊이를 알수 없는 깊고 깊음"이죠.

이것은 바로 제1장 맨 마지막 구절인 "玄之又玄- 衆妙之門"과 같읍니다.

즉 " 玄에서 더 깊은 玄으로 들어가면-온갖 미묘한 빛이 나오는 문이있다"

이 '玄之又玄'이 바로 이장에서 말하는 '淵兮'로 표현되었읍니다.

수행자 여러분들께서는 "깊이를 알수 없는 깊음 그리고 玄之又玄"에 대하여

특히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다른 번역서들을 잠깐 예를 들어 보겠읍니다.

"심원하기가 만물의 조종인 듯하다"

"깊구나 ,마치 만물의 종주인 듯이"

"그윽하도다! 만물의 으뜸 같도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깊은 연못과도 같구나, 만물의 본원인 듯 하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挫; 꺽다, 꺽이다. 其; 그것, 銳 ; 날카롭다, 날래다,

解 ; 풀다,흩어지다,느슨하다,깨닫다, 紛 ; 어지럽다, 엉크러지다, 번잡하다.

和 ; 화하다,순하다,화해하다,응하다,합치다, 同 ; 같다. 한가지,

塵 ;티끌,때,더럽히다, 소수이름. 미세한 단위(10(-12승?))

 

이 네구절은 도의 본체로 들어가는 과정과 직접적인 체험을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즉, 노자도인이 좌정하고 앉아서, 삼매에 젖는 과정을 두단계로 아주 명확하게

표현해논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은 누구도 이구절에 대한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글자의 겉표면으로 나타난 낱말 풀이로만 해석을 해 놓았읍니다.

 

심지어 어느 중국의 주석가는 이 네구절이 56장에서 잘못 옮겨져 기술된 것이라고

지적한 이도 있읍니다,

왜냐하면 기존 개념으로 해석을 하려니 맨첫번째와 중간과 마지막 구절들 사이에

연결되는 논리구조가 전혀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구절은 고도의 수행과정인 절대삼매과정을 묘사했지만,

너무나 단순하게 묘사를 해서 이천사오백년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이글 속에

감추어진 숨은 비의(秘意)를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깊은 단계에 들어가 본 수행자라면 이 네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고,

글자 한자,한자에 다 드러나 있는 의미를 자꾸 되씹어 볼 수록 점점 환하게

드러나게끔 되어 있읍니다.

이런 기회에 수행에서의 삼매과정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언급해서

구도자들이 용기를 갖고 정진 할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나온 주석서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의미이고,

1800여년전의 왕필이 주석부터 16세기 명나라시절 유불선 삼학의 대가인 감산대사의 주석서, 최근 중국의 석학 임어당 주석서를 비롯하여, 중국본토의 주석서들도 이 4장의 네구절에 대한 핵심적인 언급이 없이, 그냥 글자 뜻풀이 수준에서 주석을 한 것 같읍니다.

그러니 한국어로 번역된 해석서들이야 전부가 전래되어온 중국의 주석서를 참고로 해석한 것이지요.

심지어 수행의 최고봉이라는 선불교선사인 감산대사와 깨달았다는 여러분들의 주석서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읍니다. 

자- 이제 해석해 보겠읍니다.

 

挫其銳

직역을 하면 - 그것은 날까로움을 꺾는다.-

여기서 其는 도의 작용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만,

해석상에는 그냥 "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죠.

그러나 정확하게는 "지금 여기서 삼매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銳라는 것은 날카로움을 가리키는데, 그 "날카로움"이라는 것이 바로 "나라는 에고의식"을 의미하는 것이죠.

"나라는 개인의식"은 항상 외부대상을 향해서 날카롭게 주의(注意)가 모아져 있죠.

그래서 오감각기관에 의해서 나타난 온갖 경계들을 개별적으로 분별하는 날카로운 분별의식으로 모든 현상을 갈라서 찟어서 분리시키죠.

그리고 "나"라는 개체성 자체도 다른 현상과 분리시켜서 홀로 삐죽하게 톡 튀어 나와 있읍니다.

그 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감각기관은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어 항상 밖에 대상을 향해서 쫏아 다니죠.

이러한 여러가지 외향적인 분별의식을 묘사한 것이 바로 "銳, 날카롭다"라는 한단어로 합축해서 노자도인은 표현했읍니다.

 

挫는 "꺽인다"는 뜻으로 날카로움이 꺽인다,라는 뜻이죠.

그래서 번역하면 -좌기예- 밖으로 향하는 날카로운 분별의식이 꺽인다-

이런 뜻이 되는 것이죠. 한마디로 외부 대상으로만 향해서 뾰족 튀어나온

에고적 분별의식이 사그러진다는 의미죠.

< 날카롭게 밖으로 향해서 분별하는 마음을 꺽어서 누구려 뜨리면> 

 

解其紛

직역해 보면 - 얽힌 것이 풀어진다-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紛은 실타래 마구 뒤엉켜 있는 상태를 나타나며, 여기서는 인연과 경계에 얽혀서 집착에 매인 "나의 業"을 의미하는 것이죠.

解는 풀린다, 풀어진다, 해방한다, 등의 뜻이 있읍니다.

따라서 해석을 해보면,

< 온갖 인연과 경계에 얽힌 속박으로 부터 풀려난다.>

 

이래서 다시 -挫其銳 解其紛- 두문장을 합치면,

<날카롭게 대상을 향해서 분별하는 마음이 꺽어져 누구려 트리면,

온갖 경계와 인연으로부터 얽힌 속박(업)에서 풀려난다>

먼저 挫其銳 하면 解其紛이 된다는 순서로 삼매가 단계적으로 깊히 들어간다는

말씀이지요.

즉, 유상(有想)삼매에서 일시적 무상(無想)삼매로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밖으로만 향하던 외향적인  에고의식이 꺽어져 내면으로 향해지면,

모든 경계와 인연 욕망등의 業이 풀어져서, 마음이 순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태는 최종적인 해탈상태가 아니라, 의식이 경계와 습이 사라진 순수의식상태라고 볼 수 있죠.

즉, 순수존재의식상태이며, 모든 경계가 사라진 우주적 자아의식이라고 보면 됩니다.

불교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8아뢰아 저장식의 맨 마지막 단계이며,

체험상으로는 空의식이지만, 아직 절대본체에는 도달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보통 이삼매상태를 유상 또는 일시적 무상(無想)삼매상태 정도로 보면 되겠읍니다.

절대본체와 육체개아의식의 중간 다리역활의 완충지대로써, 절대쪽 보다는 의식에 좀 가까운 부분이며,

경계가 사라진 순수의식이기 때문에 보통 의식빛(光)으로 표현합니다.

 

和其光 同其塵

<和其光>을 직역해 보면,

<그것에 의식의 빛이 합일되면>

즉, 앞에서 에고의식이 사그러지면, 모든 경계와 업이 녹아서 순수의식이 된 다음,

和其光, 이 순수의식의 빛이 다시 道의 절대본체에 합일된다는 내용입니다.

의식은 원래 처음에 절대본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본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것 뿐이죠.

이 의식의 빛이 절대 본체로 합일 되는 과정이 바로"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지점을 묘사한 것입니다.

의식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이것이 절대본체와 완전합일되면, 보통 말하는 최종적 해탈, 니르바나 라고 하는 과정입니다.

 

그다음 <同其塵>은 해석하면 <그것은 아주 미세한 티끌과 같다>

여기서 其는 앞의 화기광상태,즉 순수의식빛이 본체에 합일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죠.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워낙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다는 의미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죠.

따라서 두구절을 합쳐보면,

< 도의 본체에 순수의식 빛이 합일되면,

 아주 미세한 티끌 속 같아서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가 되겠읍니다.

완전히 도의 본체에 합일되면, "나"가 사라진다, 라는 말씀이지요.

여기서 티끌 塵,은 '속세'라는 의미가 아니라,

아주 미세하게 작아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소위 선불교조사들이 말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사성어와는 뜻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불교선사들이 말하는 화광동진이라는 뜻은 "깨달음을 증득한 도인이 자기의 깨달음의 능력(光)을 숨기고(和), 속세(塵)에 나와서 보통 중생들과 어울려(同) 말없이 선도한다"는 의미인데, 모든 해설서와 번역서들이 이 불교선사들의 '和光同塵'의 의미로 이 노자도덕경을 해석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노자도덕경의 이구절에서 이 화광동진이라는 사성어를 빌려서 썼는지는 몰라도,노자도덕경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700~200년사이에 기록된 것인데,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법을 펼칠때가 대략 기원전 약 500년경이라면, 노자 도덕경이 거의 석가모니 생전시기에 가까이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에는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고,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이 대략 기원후 500년경이고, 선불교의 시조격인 혜능대사 역시 기원후600~700년 사람으로 노자도덕경이 쓰여진 시대와는 1000년가까이 차이가 나죠.

따라서 화광동진이라는 뜻을" 깨달은 도인이 속세와 함께 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후대의 어떤 선스승이 노자도덕경의 이구절에 나오는 화기광 동기진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다르게 쓴 것인지는 모르겠읍니다.

여하튼 화기광 동기진의 티끌 塵은 속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의 아주 미세하게 작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티끌같이 미세한 점이 바로 모든 현상계가 나타나는 문으로써

"존재의식의 발현 핵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핵점이 "나"라는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구멍이죠.

그래서 완전히 깨달은 성인들은 제자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이 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이 점이 바로 절대본체의 문이며, 순수존재의식의 시작점이죠.

제1장의 마지막구절인 玄이 더 깊어지면 온갖 "만물이 나오는 門"이 있다,고 한

구절이  바로 이 존재핵점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위의 네구절을 정리해 보면,

이 완전 절대본체로 들어가는 데까지 두단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 외부로 향하는 에고의식을 꺽어서, 모든 경계와 인연으로부터 해방되는 순수존재의식이

되는 과정이 1차 과정이며,

2. 이 순수의식 빛이 본체에 합일되어 완전히 먼지처럼 사라지는 최종적 절대본체가 되는

과정이 있읍니다.

이4장은 바로 이구절이 숨겨진 비의(秘意)이며,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제 다른 번역서들의 해석을 예를 들어 보겠읍니다.

" 그 날카로움이 지나치면 깍아주고, 그 얽힘이 지나치면 풀어주며, 그 빛남이 지나치면

누구러 뜨리고, 그 티끌됨이 지나치면 고르게 한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풀며, 그 드러나는 빛을 감추고, 세상과 하나가 되네."

"도의 가지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하면, 빛이 어우려져 춤을 추는 것 같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헤쳐 그 속을 보려함은 다만 낱낱이 티끌이 있을 뿐이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푸는도다, 그 빛이 튀쳐남을 없게 하고, 그 티끌을 고르게 하네."

"도는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단순함으로써 복잡한 것을 다루고, 광명이 있는 곳에서는

그 광명과 조화를 이루고, 세속의 티끌이 있는 곳에서는 그 티끌과 동화한다"

"날카로움이 꺽기고, 혼란스러움이 해소되며, 새롭게 보이는 세상과 조화를 일구며 세상에서

묵묵히 살아가게 됩니다"

아주 번역들이 다양합니다.

 

湛兮 似或存

湛 ; 괴다,즐기다,잠기다,빠지다,괴다, 즐기다,탐닉하다.

存 ; 있다.

직역해 보면, 

(티끌 속에) 잠겨 있으니, 마치 (내가)있는 것 같기도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앞에서 티끌 속에 잠겨 있는 것은 완전히 삼매속에 묻혀 있는 것인데,

<어쩌면 있는 것도 같다>,라고 도인이 혼잣말을 하고 있죠.

즉, 그 절대본체의 출입구에서 완전히 절대속으로 깊히 빠진 것이 아니고,

문지방에 걸터 앉아 있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바로 육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삼매에서 나와서 이런 글을 쓸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절대본체에 한발을 잠겨놓고, 한발은 이쪽 의식쪽에 걸쳐서 있는 것이죠.

그래서 원래 삼매 속에서는 "전혀 자기자신이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마치 있는 것도 같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것이죠.

 

말을 가듬어서 번역해 보면

< 삼매에 푹 잠겨 있으니, 기묘하게도 마치 있는 것 같기도 하네>

 

다른 번역서들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 분명하구나, 마치 존재하는 사물들 처럼,"

"맑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것만 같은 것이다"

"맑고 또 맑아라, 저기 있는 것 같네"

"맑고 맑아서 어찌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윽도 하구나, 혹 존재하는 듯하네"

" 그 맑디 맑은 삶의 모습이여, 가벼운 느낌마저 들것입니다."

" 도는 유현하고 은밀해서 분명치 않은 듯이 보이지만, 그 유연함과 은밀함 속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듯하다"

 

이렇게 간단한 문장이 해석이 다색 다양해진 것은 바로 그 앞구절인 좌기예 해기분,회기광,동기진, 의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을 할 수가 없었서, 상상과 추론에 의해서 말을 억지로 뚜드려 맞추려니깐, 여러가지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湛을 왜 맑다,라고 모두들 비슷한 해석을 했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원래 맑다,는 淡이고, 여기에 있는 이 湛은 즐기다,고이다, 빠지다, 취하다,하는 의미인데,

아무리 해석을 맞추려고 해도 뜻이 안통하니깐 아마도 湛자를 아예 뜻풀이까지 바꿔가며

글내용을 맞추려고 모두들 무진애를 쓰신 것 같아 보입니다.

 

吾不知誰之子

吾 ; 나,

誰 ; 누구, 무엇,

직역하면,-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겠네.-

이말은 삼매 속에 잠겨서,"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도 모르겠네'하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죠.

'누구의 자식'인지를 모른다는 말은, -내가 나온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말이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말과 같읍니다.

< 나는 어디로 부터 나왔는지 모르겠네>하는 혼자 중얼거림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吾, 즉 "나"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나"는 개인적인 나가 아니고, 道의 본체가 된 참나를 말합니다.

 

다른 해석서들을 보겠읍니다.

"나는 그것이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

" 그 비롯됨을 알수 없구나"

"도가 어디서 태어난 것인지 나는 모릅니다"

 

象帝之先

번역하면- <나는 신보다도 앞서 있네>.

여기서 상제란 코끼리 신이 아니라, 이미지가 있는 가장 높은 신을 말하죠.

보통 도교에서 옥황상제가 제일 높은 신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일단 신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 거기에 따라서 신의 이미지도 그려내기 마련이고, 코키리가 이현상세계에서 가장 큰 동물 이미지이므로,

"象帝"란 아마도 가장 높게 숭상하는 신을 말하는 것 같읍니다.

그러나 코키리 象자의 뜻은 코키리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꼴, 모양, 이미지,라는 말뜻도 있읍니다. 

 

<나는 神보다 앞서 있다>라는 의미는 "의식이 나오기 이전에 내가 있다"라는 의미죠.

왜냐하면 가장 높은 神은 가장 높은 意識상태를 상징하거든요.

따라서 결론적으로 "나는 의식 이전에 있다"라는 아주 결정적인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이죠.

 

다른 해석서를 뒤져 보겠읍니다.

"아마도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 같다"

"하나님보다 앞서 있는 것 같네."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아마도 하느님보다 앞서 존재하는 듯 하네"

"하지만 하나님보다 이전의 것임은 틀림없읍니다"

 

신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이겠지요.

참고적으로 기독교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훼"라는 명칭은 고대 이스라엘 말로

"내가 있다"라는 말로써, "보편적 존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모세가 어느 황야의 야산의 덤불나무에서 일어나는 빛에게 묻읍니다.

"신이여, 신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합니까?"하고 물으니

그 빛에서 나온 말이 "I am that I am"이라고 말했읍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이니라" 한글성경에 번역된 말이지요.

즉, "I am"는 "내가 있다"를 말하며, "보편적인 나"를 말하고,

이것이 바로 "존재의식"을 말합니다.

그래서 도의 절대본체에서 나온 빛이 바로 존재의식이며,

인류는 이것을 가장 높은 신으로 생각하죠.

여기에 여러가지 이미지나 이름을 붙혀서 숭배를 하죠.

이 "내가 있음"을 인도 베단타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죠.

그러나 어떻한 높은 신일지라도, 도의 절대본체에 버금가는 신은 있을 수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절대 본체는 맨 마지막,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특성도 없는, 모든 것의 그릇이기 때문이죠.

말이 나오기 이전, 의식이 나오기 이전, 시간과 공간이 나오기 이전이므로,

말로 표현되었다 하면, 그것은 이미 주객 이원화상태로 하락한 것이죠.

절대 본체는 오직 비이원적인 우리들의 참나입니다.

 

제가 도덕경을 보는 관점은 순수하게 정신수행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또 다른 측면으로 도덕경을 해석한다면,또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도덕경은 주 주제가 바로 道를 깨치는 것이고, 도인으로서 삶을 살아 나가는

자세와 수행인의 자세가 주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아닌 사람이 해석할 경우는 의미파악과 해석에 대단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알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기존의 도덕경을 많이 본 분이나, 새로 보시는 분들도, 새로운 관점에서,

즉, 마치 자신이 도인이 된 듯한 관점에서 읽어 주시면 더욱 알차게 이해하실 수가 있겠고, 만일 수행자라면 수행을 더욱 북돗을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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