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事成語

가계야치 家鷄野雉[집 가/닭 계/들 야/꿩 치] ~~~

예암 노마드 2013. 6. 3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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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야치 家鷄野雉[집 가/닭 계/들 야/꿩 치]

☞집안의 닭은 천하게 여기고, 들판의 꿩만 귀히 여긴다, 자기 것은 하찮게 여기고, 남의 것만 좋게 여김.아내를 소박(素朴)하고 첩을 좋아함 [유]家鷄野鶩 가계야목 : 집안의 닭은 천하게 여기고, 들판의 물오리는 귀하게 여긴다[출전]진중여서(晉中與書) 

[내용]중국 진나라에 왕희지의 서법과 견줄만하다는 유익이라는 명필이 있었다. 그의 서법을 배우고자 중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가족들은 당시 유행하던 왕희지의 서법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음이 상한 유익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이들이 집안의 닭은 천하게 여기고 들판의 꿩만 귀하게 여겨 모두 왕희지의 서법을 배우고 있으니, 한탄스럽다"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 가담항설 街談巷說[거리 가/말씀 담/거리 항/말씀 설]

☞길거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 세상에 떠도는 뜬 소문.[유]道聽道說(도청도설),街談巷語 (가담항어),街談巷議(가담항의),街談(가담)[출전]논어(論語)』양화편(陽貨篇),『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내용]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과 같다[德之棄也].길거리에서 들은 좋은 말[道聽]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塗說]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고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논어(論語)▷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한서(漢書)▷소인배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곧바로 입으로 흘러나오고[口耳之學]'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불과 네 치[口耳四寸].' 이처럼 짧은 거리를 지날 뿐이라면 어찌 일곱 자[七尺] 몸을 훌륭하게 닦을 수 있겠는가.옛날에 학문을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배운 것을 금방 다른 사람에게 고하고 자기를 위해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하지만 소인배의 학문은 인간을 못쓰게 망쳐 버린다.『순자(荀子)』권학편(權學篇)[원문]街談巷說 必有可采.-- 『文選』與楊修書 /小說家者流 蓋出於稗官 街談巷語 道聽塗說者之所造也 -- 『漢書』藝文志[참고] 稗官文學(패관문학)--패관(稗官; 지난날,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하여 가담항설을 모아 기록하게 하던 벼슬아치)이 수집한 소문과 풍설에 패관의 창의와 윤색이 가미되어 민간의 가담과 항설 등을 주제로 한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된 설화 문학. 소설이란 말도 이런 의미에서 원래는 '패관(稗官:하급 관리) 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고려 중 후기에 성행하였음. 이규보의 『백운소설』,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따위[註]**巷間, 村間, 俗間, 民間, 坊間, 閭港, 世俗, 風間. ** 街 : 곧고 넓은 길. 巷: 좁고 구불구불한 길.   [예문]▷그라운드에 유령 같은 가담항설(街談巷說)들이 떠돌고 있다. 어찌보면 해괴망측하다. 하지만 찬찬히 곱씹어보면 이만큼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도 없다.<스포츠 투데이>▷브라질 현지에서 대한축구협회의 이름을 팔아먹는 유학업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기자 역시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근거 없이 떠도는 가담항설쯤으로 여겼다. <오마이뉴스>

▷많은 스타가 뜨고 졌으며, 강팀이 탈락하고 약팀이 돌풍을 일으키는 이변도 벌어졌다. 팀가이스트의 등장, 오프사이드 완화 등 매번 월드컵은 화두를 던지고는 한다. 어떤 것은 유행이 되고, 어떤 것은 대세가 되며, 어떤 것은 그냥 사라지는 가담항설(街談巷說)에 그치고 만다.<2006헤럴드경제>▷하지만 문제는 이런 것들이 뜬소문만은 아니란 데 있다. '밀실정치''요정정치'로 이어진 우리의 정치사는 시중의 가담항설(街談巷說)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래 서 국민은 놀란 가슴을 또 다시 쓸어내린다.<2005부산일보>

■ 가도사벽家徒四壁[집 가/무리 도/넉 사/벽 벽]

☞"너무 가난하여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비유한 말[유]거도사벽(居徒四壁), 가도벽립(家徒壁立), 상여지빈(相如之貧), 일무소유(一無所有)[반]가재만관(家財萬貫:집안에 재물이 넘쳐 남).[출전]사기(史記)-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내용] 서한(西漢)시대 임공(臨공)이라는 곳에 탁왕손(卓王孫)이라는 부유한 상인(商人)이 있었는데, 그의 딸 탁문군(卓文君)은 일찍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젊고 유능한 사마상여는 이런 탁문군에게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탁왕손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사마상여는 연회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탁문군을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을 그린 연가(戀歌)를 연주하여, 그녀의 관심을 끌고 동시에 자신의 재주를 뽐내고자 하였다. 이미 사마상여의 재능을 알고 있던 탁문군은 직접 그의 출중한 풍도(風度)를 보게되자, 마음이 그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연회가 끝나고 밤이 되었지만, 탁문군의 머릿속에는 낮에 보았던 사마상여의 모습이 남아있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와 사마상여에게 도망쳐 나오자, 상여는 그녀와 함께 성도(成都)로 말을 달려 돌아 왔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다만 네 벽만 있을 뿐이었다[家居徒四壁立(가거도사벽립)].

처음에는 탁문군의 아버지인 탁왕손은 거부(巨富)의 딸이 이런 행동을 하게된 것을 몹시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나 딸과 사마상여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많은 재물을 탁문군에게 보내주었다. . 

■ 가렴주구 苛斂誅求[가혹할 가/거둘 렴/꾸짖을 주/구할 구]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들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염출斂出(出斂-->추렴). 각추렴各出斂, 갹출(醵出).--여럿이 돈이나 재물을 거두어 냄[원문]苛斂: 憲宗擢皇甫 爲相, 苛斂剝下人, 皆咎之, 以至譴逐.  -"舊唐書", '穆宗紀'/誅求: 誅는 責. 以 邑 小, 介於大國, 誅求無時, 是以不敢寧居.   -"左氏傳" 三十一  

[유]가정맹어호 苛政猛於虎 :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출전]禮記 [내용]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날 공자가 태산의 곁을 지날때, 부인이 묘지에서 곡하며 슬퍼하거늘, 공자가 엄숙히 이를 들으시고, 子路로 하여금 그에게 물어 말하되“그대의 곡성은 한결같이 거듭 근심이 있는 것 같으니라.” 이에 말하기를“그러합니다. 옛적에 나의 시아버지도 호랑이한테 죽고, 나의 남편도 또 그것에게 죽고, 이제 나의 아들이 또 그것에게 죽었습니다.”공자가 말씀하시되“어찌 이곳을 떠나지 않았습니까?”하니“가혹한 정치가 없습니다.”공자가 말씀하시되“제자들아 이를 들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것 이니라.”[원문]孔子가 過泰山側할새, 有婦人이 哭於墓者而哀어늘 夫子가 式聽之하시고 使子路로 問之曰 “子之哭也는 壹似重有憂者로다.”而曰“然하다 昔者에 吾舅死於虎하고 吾夫又死焉하고 今에吾子又死焉이니라.” 夫子曰“何爲不去也오.”曰“無苛政也니라.”夫子曰“小子아 聽之하라 苛政이 猛於虎야로다.”**過지날 과/哭울 곡/哀슬플 애/聽들을 청/舅시아비 구

 

[예문]▷ 곡식 한 톨이라도 더 우려내려고 소작인에 대한 가렴주구가 어느 마름보다 혹독하여….≪김원일, 불의 제전≫ 가렴주구

▷ 왕실의 가렴주구 때문에 난리를 일으킨 도민들에게 어찌 배상금을 물라 하며…. ≪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 부래설화[浮來說話]에는 절이 나 궤짝·바위·산 등이 떠내려오거나 이동한 이야기가 있는데 산의 이동을 주로 한 이야기가 많은 것이 강원도 지역의 특색이다. 산악이 유달리 많은 지리적 환경이 가져온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부래설화의 주제의식은 지배층의 가렴주구를 비판한 민중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근원도 모르는 부래자 때문에 민중이 겪는 고초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이 후로 길동이 호(自號) 활빈당이라여 됴션 팔도로 단지며, 각읍 슈령(守令)이 불의로 물이 이시면 탈취허고, 혹 지빈무의(至貧舞衣)이시면 구졔하며, 셩을 침범치 아니하고, 나라의 쇽물은 츄호도 범치 아니하니, 이러므로 졔적이 그 의취(意趣) 탄복하더라.- 『허균-홍길동전(洪吉童傳)』 중에서▷ 조선시대 서거정의 패관문학 중 ‘돼지가 삼킨 폭포’라는 작품이 있다.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심한 수령이 한 승려에게 “너의 절의 폭포가 좋다더구나”라고 말했다. 폭포가 무슨 물건인지 모르는 승려는 그것마저 또 빼앗으려 하는가 두려워 “저의 절의 폭포는 금년 여름에 돼지가 다 먹어버렸습니다(猪喫瀑布)”라고 답했다.

▷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촉루낙시(燭漏落時) 민루낙(民淚落)이요, 가성고처(歌聲高處) 원성고(怨聲高)라." 이글 뜻 은,"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인의 피요, 옥소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도다."(춘향전) 관청에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키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또한 끝이 없다. ▷ 영주(永州) 땅에는 기이한 뱀이 나오는데 검은 색 바탕에 흰색무늬로 그 뱀이 초목에 닿기만 하면 초목이 모조리 말라 죽었고, 사람이 물리면 치료할 방법이 없이 죽어야 했는데, 이렇게 독한 까닭에 심한 중풍이나 팔다리가 굽는 병, 악성종양 등을 치료하는데 쓰일 수 있었다.   그래서 왕명에 의하여 이 뱀을 잡도록 하였고, 이 뱀을 1년에 두 마리를 바치는 사람에게는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그만큼 잡기도 어려울 뿐더러 목숨을 걸고 해야 할만큼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그럼에도 영주사람들은 앞다투어 그 뱀을 잡아 드렸다.   이 마을에 장씨(蔣氏)라는 자가 있었는데 삼대에 걸쳐 이 일에 종사하여 왔다고 했다. 그런데 꽤나 슬퍼 보여서 그 까닭을 물으니 "제 조부도 그 뱀 때문에 죽었고, 부친도 그러하였으며, 저도 몇 번이나 죽을 뻔하였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에 "그럼 세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지요"하니 "이전부터 뱀 잡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오래 전에 죽었을 것입니다. 저희 가문이 이곳에 산지 삼대(三代)가 되었지만 이웃 사람들의 생활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날로 궁핍해졌습니다. 또 이리 저리 나라에서 거둬가는 것들이 많아 먹고 살 길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다가 굶주림에 쓰러지기도 하고, 추위에 얼어 죽고, 전염병에 걸려 죽어서 지금은 열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혹독한 관리가 마을에 와서 소란을 피우면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개나 닭까지도 모두들 잔뜩 놀라 움츠리며 눈치를 보고 있지만, 저는 1년에 두 번 뱀을 바칠때만 바치고 나면 평소에는 그러한 시달림은 받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러니 대체로 1년중 죽음을 무릅쓰는 때는 두어 번이고, 나머지는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이지요. 비록 제가 이일을 하다가 죽더라도 이웃사람들보다는 늦게 죽는 것이니 어찌 제가 이일을 마다하겠습니까?"『고문진보 古文眞寶』유종원(柳宗元)의〈포사자설 捕蛇者說〉 ▷호남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예전의 읍자리 부근에 유난히 비석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가만히 다가가 풍진에 희미해진 글자를 한자 한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확인해보면 대개는 ‘전 현감 ○○ 영세불망비’니 ‘전 부사 ×× 송덕비’니 하는 것들이다. 10여년 전 광주에서 나주를 지나 목포를 가게 되었는데, 광주에서 목포 가는 구도로를 따라 예의 그 선정비와 송덕비가 촘촘히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서 나는 이 ‘선정비’들이 봉건시대에 호남 민중들이 얼마나 가렴주구를 당해왔는가를 확인해주는 반증이라고 생각했다.<2003.6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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