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旅行 이야기

沖齋권벌(1478,1548)古宅과靑巖亭(國內760개정자중랭킹3-4위)~~~

예암 노마드 2013. 6. 1. 20:45

--酉(닭유,열째지지유,7획)谷(골곡,나라이름욕,벼슬이름록,벼슬이름녹,7획)--***慶北 奉化郡 奉化邑 酉谷里***국내서는  전북에남원시인월면유곡리,

                                                                                                                                                                   전남에 영암군신북면유곡리,***세곳이있슴,

-靑巖亭-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여(酉谷先公卜宅寬)/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雲山回復水灣環)/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亭開絶嶼橫橋入)/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荷映淸池活畵看)/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稼圃自能非假學)/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軒裳無慕不相關)/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更憐巖穴矮松在)/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려(激勵風霜老勢盤)'

퇴계(退溪) 이황이 청암정(靑巖亭)을 읊은 시다. 청암정과 정자의 주인공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내용이다. 퇴계는 충재를 존경도 했지만, 충재의 증조부가 퇴계 외조모의 외조부여서 수시로 인사를 다니는 관계이기도 했다.

#충재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던 청암정

봉화에서 제일의 반촌(班村)으로 닭실(酉谷)을 꼽는다. 닭실은 안동권씨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 자리잡은 이후 후손들이 400여년간 세거한 명소이다.

충재는 소과를 거쳐 30세에 대과에 합격한 후 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정암(靜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좌절되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이 때 충재는 지난날 삼척부사로 부임하던 길에서 둘러본 뒤 마음 속에 점지해 두었던 봉화 닭실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전에는 출생지인 안동 도촌에서 살았다. 충재는 이후 조정에서 다시 부를 때까지 이곳 닭실에서 은거하며 15년 세월을 보냈다. 그는 49세(1526) 무렵에 청암정을 짓고 경학(經學)에 몰두하며 10년 동안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적명승 제3호로 지정된 청암정은 거북처럼 생긴 암반 위에 춘양목으로 건축한 정자로, 영남 최고의 정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북 암반 주위는 연못으로 둘러져 있고, 바로 옆의 종택 뜰에서 정자로 건너가는 돌다리가 더욱 운치를 더해준다. 주위에 심은 노송과 느티나무, 향나무, 단풍나무 등 고목은 수백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찬란한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퇴계 이황, 백담(栢潭) 구봉령, 관원(灌園) 박계현, 번암(樊庵) 채제공, 눌은(訥隱) 이광정 등 역대 명현들의 글이 현판으로 늘어서 있다. 남명(南冥) 조식이 쓴 것으로 전하는 청암정 현판과 미수 허목이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현판이 정자의 품격과 위상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목숨 걸고 공명정대한 국사 집행을 직간한 충재

충재는 15년 동안 닭실에 은거하며 독서하다가 밀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후 한성판윤, 우찬성을 지냈으며, 명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할 시절에는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의 정무를 대직(代直)했다. 당시 문정왕후의 아우인 윤원형의 정당과 인종의 외척인 윤임의 정당으로 대치되어 소위 소윤·대윤의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다. 이 문제를 문정왕후가 판결하려고 대신들을 충순당(忠順堂)에 소집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충재는 목숨을 걸고 공명정대하게 국사를 집행해야 됨을 직간하였다.

그러나 충재의 직간은 관철되지 못했고, 윤임 일당이 유배되는 을사사화가 발생해 또다시 충재는 파면되었다. 2년 후 부제학 정언곽이 양재역 벽에 이름 없는 조정비방문이 붙었다고 보고한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을사년 사화의 인물들에게 죄가 씌워져 충재는 또다시 구례로 유배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나라를 위해 공명정대한 대의를 외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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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청암수석'3
미수 허목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씨인 '청암수석'
좌절됨을 안타까워할 뿐, 자신의 불우함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퇴계가 지은 충재의 행장(行狀)을 보면 "압송관이 이르자 공은 기꺼이 길을 나섰다.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충재공의 손을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실성할 정도로 목놓아 울자 충재공은 웃으며 '나는 그대가 대장부라고 생각했더니 어찌 이러한가. 생사 화복은 하늘의 뜻이네. 하늘의 뜻을 어찌하겠는가(吾以子爲大丈夫矣, 何至是耶. 死生禍福, 天也. 其如天何)'라고 말했다. 충재가 아들 청암(靑巖) 권동보에게 부치는 글에는 '옛날 중국의 범충선공은 나이가 70인데도 만릿길 유배를 갔다. 너 아비의 죄로는 오히려 관대한 처분이다. 또한 내가 국은을 저버려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검소하게 장례지냄이 옳을 것이다(昔范忠宣年七十, 有萬里之行, 汝父之罪甚寬典也. 且吾負思至此, 死卽薄葬可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평안도 삭주(朔州)로 유배된 충재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이듬해 명종 3년(1548) 3월에 북녘 땅 삭주에서 71세로 운명했다. 충재는 명종 21년(1567)에 신원돼 모든 관직이 복권되었고, 선조 4년에는 '충정공(忠定公)' 시호가 하사되었다.

#충재와 근사록

충재는 일생 동안 독서를 쉬지 않았다. 특히 '근사록'을 탐독하였으며, 늘 소매 속에 근사록을 넣고 다녔다.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중종이 대신들과 후원에서 상화연(賞花宴)을 열어 취하도록 마시고 파한 뒤 자리를 정리하던 신하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주워 임금에게 바치니 중종은 "아마 권벌의 옷소매에서 빠졌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돌려주도록 명했다 한다.

충재가 지니고 다니던 근사록은 고려 공민왕 9년(1370)에 간행된 목판본 4책으로, 보물 262호로 지정됐다. 충재 수택본(手澤本)으로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또한 중종은 초주(初鑄) 갑인자본 근사록 9권3책을 충재가 도승지로 근무할 때 하사했고, 영조는 무인자본 근사록 14권4책을 충재 6세손 권만을 통해 충재 고택에 하사했다. 모두 보물 896호로 지정됐고, 충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충재는 장성한 후 하루도 빠짐 없이 일기를 썼다. 지금 전하는 일기로는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신창영유단일기(新昌令惟斷日記) 1책, 당후일기(堂後日記) 1책 등 6책이 있다. 이 모두 450년 전 사회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보물 제261호로 지정된 이 일기들도 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현재 종택 옆에 충재기념관을 신축하는 공사가 진행중이고, 청암정 역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미수 허목은 청암정에 한 번 가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다가, 88세 되는 해(1582년) 4월에 '청암수석(靑巖水石)' 네 글자를 써놓고 글씨를 보내기도 전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달 하순에 운명하니 이 글씨가 미수의 절필(絶筆)로 알려진 것이다. 미수가 후미에 써놓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청암정은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자를 큰 글자로 써 보내노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은 쓴다(靑岩亭者, 權忠定公山水舊庄.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61023.010280755280001

 

금원정(琴元貞)의 자(字)는 정숙(正叔)이고 호(號)는 농수이며 본관은 봉화(奉化)로서 문곡 금휘(文谷琴徽)의 아들이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진사(進士)가 되고 중종(中宗) 때에 관리로 나아간 뒤 주위 사람들의 신망 속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문계서원(文溪書院)에서 향사(享祀)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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